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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미술운동의 주춧돌이 된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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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는 '당신의 시대가 흥미롭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이었고, 큐레이터 김현진이 정한 한국관 제목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였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에서 차용한 저 제목에서 김현진이 말한 '역사'는 서구 백인 남성의 역사이고, '우리'는 거기서 배제된 소수자-여성 퀴어 입양인 이주민 등-였다. 그는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역사를 젠더적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다"고 말했지만, 역사를 '미술사'로 치환할 수도 있겠다. 그는 한국관을 모두 소수자성을 주제로 작업해온 여성 작가들(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의 작품으로 꾸몄다. 본전시 작가 79명 중 42명(53%)이 여성이었고(2015년 33%, 2017년 35%), 본전시 한국 작가도 모두 여성이었다(이불, 아니카 이, 강서경).
하지만 국제 미술계 전반의 사정은 여전히 딴판이다. 2008~18년 미국 26개 주요 미술관(박물관)이 영구 소장품으로 구매한 작품 중 여성 작품은 11%에 불과했고(흑인 작품은 3%), 2018년 주요 국제 아트페어에 초대된 작가 2만7,000여 명 중 여성은 24%였다. 2008~19년 상반기까지 주요 경매시장에서 거래된 미술품 평가 총액(1,966억달러) 중 여성 작가 약 6,000명의 작품 거래가는 40억달러(2%)로, 같은 기간 피카소 한 사람 작품 거래가(48억 달러)에도 못 미쳤다. 그나마도 쿠사마 야요이, 루이스 부르주아, 조지아 오키프 등 저명 여성 작가 5명의 작품에 16억달러(40.7%)가 쏠렸다. 한국관 제목과 달리 현실은, 적어도 아직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다.
1960년대 말, 미술사에서 여성의 성취를 부각하고, 비평과 전시, 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을 고발하는 페미니즘 미술운동도 시작됐다. 미국 작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 1939~)의 1969년 '유지 예술(Maintenance Art)을 위한 선언'과 이후의 작업이 원년의 예라 할 만하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하던 그는 결혼-임신과 가사노동으로 단절된 작가 경력과, 여성 예술가에 대한 사회의 편견에 분노하며 (남성에 의한) 예술을 가능하게 해온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예술의 한 장르로 구현했다. "모든 혁명의 씁쓸한 맛: 혁명 이후 월요일 아침 쓰레기는 누가 치우는가?(...) 나는 예술가이고, 여성이고 아내이고 어머니다. 나는 빨래 청소 요리 보수 부양 유지 노동을 하면서, 별도로 예술을 해왔다. 이제 나는 그 일상의 유지 활동을 의식적으로, 예술로서 전시하고자 한다." 그는 73년 7월 코네티컷 주 워즈워스 아테니움미술관 계단 걸레질 퍼포먼스로 가사노동을 공공예술화했다. 남성 예술가들이 그들의 예술을 위해 착취해온 여성 노동을 전시한 거였다.
"모든 혁명의 씁쓸한 맛:
혁명 이후 월요일 아침 쓰레기는 누가 치우는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1969년 '유지 예술을 위한 선언'에서.
비평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1931~2017)이 에세이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1971년 예술잡지 '아트 뉴스' 1월 특집호에 발표했다. (그의 책 '페미니즘 미술사'에서) 주된 원인으로 그는 중세-근대를 관류해온 교육 차별과 기회 박탈을 지목했다. "에스키모인 테니스 선수가 없"듯이 "(이 현실은) 우리의 운수나 호르몬, 월경주기, 혹은 내적 공허 때문이 아니라 사회제도와 교육 때문"이라고, "만일 피카소가 여자 아이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라고 썼다. (남성)예술가의 위대성을 거의 종교적으로 고양시킨 19세기 이래의 천재 신화도 꼬집었다. 홀바인 뒤러 라파엘 베르니니 피카소 칼더 자코메티 등 다수의 위대한 예술가가 모두 예술가 집안 출신이었고, 그들은 가계 전통에 따라 어려서부터 전문 예술교육을 받으며 교습비 면제 등 특혜를 누렸다. 반면 여성은 기회뿐 아니라 전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없어서, 미술의 기초인 누드화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한 법적-제도적-문화적 차별 때문에, 귀족이 예술 애호가나 후원자 역할을 중시해 직접 붓을 들지 않은 것처럼 여성은 예술을 하더라도 '적절한 교양' 수준의 아마추어리즘에 그쳐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었다고 썼다. 노클린의 저 관점은 80년대 이후 '본질주의적 한계' 등을 지적받아 왔지만, 여성 미술(가) 차별을 역사적-구조적으로 고찰한 최초의 문건으로, 페미니즘 미술운동의 출범 선언문 같은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노클린의 에세이가 발표되고 약 한 달 뒤, 미국 워싱턴D.C 코코런미술관(Corcoran Gallery of Art)이 제32회 미국현대미술비엔날레를 개최했다. 팸플릿에 소개된 작품은 모두 남성 작가의 것이었다. 항의시위가 시작됐고, 38세 작가 메리 베스 에델슨(Mary Beth Edelson, 1933.2.6~2021.4.20)이 선봉에 섰다. 미술관 측은 그에게 여성 작가들의 입장을 모아 달라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그는 이듬해 미국 최초 '전미 시각예술 여성작가 컨퍼런스'를 기획해 바로 그 미술관에서 열었다.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미술사학자 등 350여 명이 참가한, 미국 페미니즘 미술운동의 실질적 출범식이 된 그 행사장 연단에 주디 시카고, 일레인 드 쿠닝, 미리암 샤피로, 린다 노클린 등이 섰다.
에델슨은 참석자 중 몇몇 지인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담을 수 있는 상징적인 작품 아이디어를 구했다. 에드 맥고윈이 "(과거) 결별의 기점으로 제도화한 종교를 모티브로 삼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2013년 인터뷰에서 에델슨은 곧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남성들의 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여성 작가들의 얼굴로 대체해보자고, '좋아, 철저히 배제되면 당신들의 기분은 어떤가?'라고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현존하는 미국의 몇몇 여성 작가들'이란 그의 72년 문제작이 그렇게 탄생했다. 조지아 오키프를 예수의 자리에, 헬렌 프랑켄탈러와 루이스 부르주아, 오노 요코 등을 사도의 자리에 앉히고, 테두리에 69명의 얼굴을 이름과 함께 배치한 작품. 그 작품은 남성 작가가 전유한 소위 '위대한 예술'과 종교로 상징되는 성차별에 대한 전복적이고 해학적인 예술적 도발이었다. 보수 종교계의 거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포스터로 인쇄돼 70년대 대표적 페미니즘 문화상품 중 하나로 뜨겁게 소비됐다.
회화 조형 행위예술 등으로 70년대 이후 페미니즘 미술(운동)의 주역으로, 또 불쏘시개로 이바지한 메리 베스 에델슨이 알츠하이머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인디애나 주 시카고의 치과의사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는 13세 무렵부터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주말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해 드포(DePauw)대와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업 작가가 됐다. 청소년기부터 2차대전 난민 정착 지원사업에 힘을 보태는 등 현실 참여 문제에 예민했다는 그는 학부 졸업전 출품작 중 한 점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학교 측에 의해 전시거부를 당하는 경험을 겪었다고 한다. 6개월 만에 결딴난 55년의 첫 결혼 이후 그는 세 차례 결혼-이혼했고, 플로리다와 인디애나주, 워싱턴D.C, 뉴욕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가 코코런미술관 시위를 이끈 건 사업가였던 세 번째 남편과 결혼해 아들을 키우며 워싱턴D.C에 살던 때였다. 변호사였던 두 번째 남편과 딸 양육권을 두고 소송까지 벌인 끝에 결별한 뒤였다. 훗날 그는 "내가 여성의 게토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성취를 생각할 때마다, 그(두 번째 남편)는 나를 '보헤미안'이라며 '딸을 포기할 테면 그리 하라'고 다그치던 대단히 엄한 선생"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72년 행사와 다 빈치 패러디 작품으로 그는 실질적으로 '게토'에서 벗어났다. 인터넷이 없던 때였고, 72년 작품에 등장한 작가 다수도 서로를 모르던 때였다. 프랭클린&마셜칼리지 예술학부 교수 린다 알레시(Linda Aleci)는 "에델슨은 저 그림으로 가상의 여성작가 공동체를 구현한 셈"이라며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미술운동의 미래를 선제적으로 구현한, 소셜미디어 이전 시대의 네트워크"라 평했다. 다수의 갤러리와 큐레이터들도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 목록처럼 그의 포스터를 활용했다고, 뉴욕시립대 미술사 교수 겸 큐레이터 캣 그리펜(Kat Griefen)은 칼럼에 썼다.
페미니즘 영화 비평가 로라 멀비(Laura Mulvey, 1941~)가 1971년 에세이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에서 여성(의 몸)을 향한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폭로했다. 그는 카메라·서사·관객의 시선이 모두 남성의 것이고, 여성은 객체 즉 관찰-관음의 대상으로 착취당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원 시절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을 공부한 적이 있던 에델슨은 멀비의 저 논문에서 자극 받아 70년대 초부터 '여성의 부상(Woman Rising)'이란 주제로 일련의 누드 사진 콜라주와 행위예술을 전개했다. 사막 같은 황량한 자연을 배경 삼아 도발적 포즈의 나체로 자신의 몸을 촬영한 뒤 거기에 물감으로 상징적인 도식 등을 덧칠한 작품들. 그는 "응시 당하는 객체가 아닌 '발견된 주체'로서의 몸,(...) 페니스의 부재를 결핍과 동일시하는 인식에 저항하며, 강력하고 자기규정(self-defining)적인 존재로서 내 몸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 중에는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의 형상도 있었다.
전시장 관객의 설문을 받는 '이야기 상자(story gathering box)' 프로젝트도 1972~2014년까지 진행했다. "남자아이(또는 여자아이)가 된 기분은 어땠나요?" "아버지가 여성에 대해 어떤 것을 가르쳤나요?" 등의 질문이었다.
세번째 이혼 직후인 76년 그는 뉴욕에 정착, 여성 작가들을 위한 미국 최초 비영리 갤러리인 'A.I.R 갤러리'에 가담했고, 77년 여성 예술가 모임 '이단자들(Heresies)'을 설립해 이끌며 예술잡지 'The Heretics'를 창간했다. 비서구 여성작가, 여성과 폭력 등을 주제로 한 예술적 이슈에 주목한 그 잡지는 93년 27호까지 발간됐다.
신화 속에서 잊히거나 부수적 존재로 밀쳐진 여신들의 힘과 영성을 부각하기 위한 의례적 퍼포먼스와 사진 작업도 병행해, 77년에는 크로아티아의 신석기 동굴까지 가서 촛불 조명 속 행위예술을 펼쳐 그 장면들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루시 리퍼드(Lucy Lippard)는 "에델슨의 행위예술에는 두 가지 관점, 정치적 분노와 삶의 긍정이 내포돼 있다"고 썼다. 90년대의 그는 할리우드의 성적 아이콘 혹은 '팜므파탈'로 소비된 마릴린 먼로, 주디 갈란드 등 여성 배우들에게 권총이나 갈고리를 들리는 콜라주 작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93년 6월 버지니아 주 매나사스(Manassas)의 미용사 로레나 보빗(Lorena Bobbit, 1970~)이 음주 가정폭력과 강간을 일삼던 남편 존(1967~)의 성기를, 그가 잠든 사이에 잘라 내다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봉합수술을 받은 존은 고의 중상해 혐의로 아내를 고소했고, 로레나는 성폭행(강간) 혐의로 남편을 맞고소했다. 그해 말 배심원단은 남편의 성폭행을 무죄 평결했고, 이듬해 초 로레나는 '일시적 정신이상'에 의한 범행이 인정돼 무죄 평결과 함께 45일 보호관찰형을 선고 받았다.
그해 에델슨은 먼저 회화로, 이듬해에는 조형물로 저 사건을 '예술화'했다. 94년 젠더 폭력을 주제로 열린 'Combat Zone' 단체전에 출품한 그의 조형작 '칼리/보빗(Kali/Bobbit)은 힌두교 '파괴의 여신 칼리'로 의인화한 보빗(마네킹)이 칼과 남자 성기를 든 형상이었다.
에델슨(의 작품들)에 대한 예술계 평가는 사회적 인지도에 비해 대체로 인색했다. 주요 미술관들의 기획전에서도 그는 소외되곤 했다. 그는 그런 결정을 누가 하고 도드라진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안다고, "여성운동은 본질적으로 집단 연대의 형태로 이뤄지지만, 더러 개인이 지목 당해 불이익을 받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2007년 LA 컨템퍼러리아트뮤지엄이 연 'WACK!: Art and Feminist Revolution' 전시회에 그의 작품 5점이 전시된 게 사실상 그의 메이저 무대 데뷔였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그의 작품 다섯 점을 영구 소장 목록에 포함시킨 것도,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도는 순회전 형식으로 진행된 저 전시 직후였다. MoMA가 구입한 그의 작품에는 72년 다 빈치 패러디 작과 자매작인 '가부장제의 죽음(Death of Patriachy, 1976)'도 포함됐다.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같은 방식으로, 'Heresies' 회원들의 얼굴로 콜라주한 그 작품 속 니콜라스 박사의 자리에는 그의 얼굴이, 시신의 몸에는 'The Patriachy'란 명찰이 얹혔다. 현재 그의 작품은 구겐하임미술관, 코코런갤러리, 미국사박물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스웨덴 말뫼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등에도 있다.
작품에서처럼, 평소 에델슨은 유머와 아이러니를 즐겼다고 한다. 친구인 작가 수전 레이시(Suzanne Lacy)는 "에델슨은 분노와 아이러니 둘 모두를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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