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대선, 강경보수 압승 확정… 재개된 핵합의에 악재 되나

입력
2021.06.20 10:03
수정
2021.06.20 17:5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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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강경파 라이시 62% 지지율로 당선
취임 전 美 제재 받던 인물 당선 첫 사례
이란 핵협상 재개 앞둔 서방 고민 깊어져

19일 이란 테헤란 이맘 후세인 광장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 후보 지지자들이 그의 당선 확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테헤란=EPA 연합뉴스

19일 이란 테헤란 이맘 후세인 광장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 후보 지지자들이 그의 당선 확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테헤란=EPA 연합뉴스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 보수 후보인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61)가 당초 예상대로 압도적 지지 속에 당선이 확정됐다. 서방에 우호적인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과는 달리, 미국 등에 적대적인 대외 노선을 걷는 그가 승리하면서 서구 사회의 대(對)이란 관계에도 먹구름이 끼게 됐다. 이란의 핵 보유를 막으려는 미국과 유럽 등의 협상이 강경파 정권을 상대로는 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다시 시작된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복원 협상에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미 강경파 라이시 압도적 승리

19일(현지시간) 이란 내무부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라이시 후보가 1,792만6,345표를 얻어 62%의 지지율로 당선됐다고 밝혔다. 경쟁 상대로 꼽혔던 개혁파 압돌나세르 헴마티(242만7,201표·8.4%) 후보와는 압도적 격차다. 당선인의 공식 취임은 오는 8월 중순이다. 임기는 4년으로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라이시는 중동의 대표적 반미(反美) 이슬람 국가인 이란 내에서도 대표적인 강경 보수 성향 인물로 꼽힌다. 보수를 대표하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의 측근인 데다, 최고지도자 사망 또는 유고 시 후임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부의장이기도 하다. 당선 확정 후 취재진에게 그는 “현 정부의 경험을 활용해 국가의 문제들을 푸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특히 민생 문제를 챙기겠다”고 말했다.

라이시 당선으로 향후 이란과 미국의 마찰은 불가피하게 됐다. 그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강력한 이란을 위한 대중 정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의 제재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경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장 라이시 자신부터 1988년 정치범 대규모 사형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2019년부터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 미국 정부 제재 대상이었던 인물이 새 이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건 처음이다.

이란 핵합의에서 이란 대표단을 이끄는 압바스 아락치 외무부 차관이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핵합의 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핵합의는 20일 회의를 재개한다. 빈=로이터 자료사진

이란 핵합의에서 이란 대표단을 이끄는 압바스 아락치 외무부 차관이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핵합의 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핵합의는 20일 회의를 재개한다. 빈=로이터 자료사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미 국무부는 이날 “이란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과정을 통해 지도자를 뽑을 권리를 거부당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하메네이 입김이 강한 헌법수호위원회가 중도·개혁 성향 인사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투표 거부 운동이 확산됐고, 투표율도 역대 최저 수준(48.8%)을 기록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라이시의 당선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은 발언”이라고 풀이했다.

핵합의 협상 재개에도 변수?

이번 대선 결과가 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재개되는 이란 핵합의의 변수가 될지도 국제사회의 관심사다. 이란 체제상 국가 중요 안보·외교 사안 결정권은 대통령이 아닌 최고지도자에게 있는 만큼, 일단 협상은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이란 역시 그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회의를 진행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핵합의에서 이란 대표단을 이끄는 압바스 아락치 외무부 차관은 최근 알자지라 방송 인터뷰에서 “라이시의 외교 전략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며 “그가 당선돼도 협상 과정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다만 보수 성향 의원들이 의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도 강경파 인물이 차지함에 따라 긴장 고조 가능성은 커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라이시가 핵합의 참여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독일)과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의 조건’으로 협상하길 원할 것”이라며 “앞으로 (서방과의) 대화가 더욱 복잡해질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달 19일 이란 테헤란에서 친팔레스타인 성향 시위대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테헤란=AP 자료사진

지난달 19일 이란 테헤란에서 친팔레스타인 성향 시위대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테헤란=AP 자료사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 이란이 우라늄 농축 비율 상한선을 넘어서는 등 강경책을 꺼내 들 수 있는 탓이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라이시 당선은 서구와 테헤란(이란)과의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로하니 시대’로부터의 철저한 이탈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의 진영 간 희비도 엇갈렸다. 서방과 대립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라이시에게 축하 메시지를 각각 보내며 새 정부 출범을 환영했다. 반면, 중동 지역의 유일한 비공식 핵보유국이자 역내 최대 적성국인 이스라엘은 그가 핵무기 개발에 전념할 것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야이르 라피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날 트위터에 “’테헤란의 도살자’로 알려진 이란의 새 대통령은 이란인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이란 정권의 핵 야욕과 글로벌 테러에 전념할 것”이라는 논평을 올렸다. 특히 최근 이스라엘에서도 보수 강경파인 나프탈리 베네트가 새 총리로 선출된 터라, 오랜 앙숙인 양국 관계는 8년 만에 다시 ‘강대강’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허경주 기자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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