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꿈은 '더 나은 세상' 아닌 '일확천금'이었다"

입력
2021.06.17 1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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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캐니 밸리'의 저자는 실리콘밸리가 진보와 자율을 미덕으로 내세웠지만 능력주의로 점철된 후기 자본주의의 소굴이라고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캐니 밸리'의 저자는 실리콘밸리가 진보와 자율을 미덕으로 내세웠지만 능력주의로 점철된 후기 자본주의의 소굴이라고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국내 대표 정보기술(IT) 업체 네이버 직원의 극단적 선택은 편리한 디지털 플랫폼 이면에 구성원의 희생이 있음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네이버를 비롯한 IT 기업 대부분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열망의 결합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잘 안다. 담대한 변화로 나가는 길이란 결국 구성원의 과도한 업무의 토대 위에 마련되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의 기치를 내건 빅테크 기업도 결국 '효용 극대화'라는 전통적 대기업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2010년대 중반 미국 실리콘밸리 IT업계에 비(非)개발자로 발을 들인 애나 위너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이처럼 진보와 자율의 외양 아래 과잉 능력주의를 숨기고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언캐니 밸리'는 실리콘밸리 IT업계의 이상향과 현실적 괴리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기록한 책이다.

미국 IT업계를 다룬 수많은 책이 혁신가·창업가들의 경영 철학 위주인 것과 달리 '언캐니 밸리'는 스타트업 말단 비개발자의 체험기다. '불쾌한 골짜기'로 풀이되는 제목 '언캐니 밸리'는 인간을 닮아가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자는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언캐니 밸리'를 경험한다.

'언캐니 밸리'의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남초 현상을 지적하며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캐니 밸리'의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남초 현상을 지적하며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야기의 시작은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기업)이라는 표현이 막 등장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의 한 문학전문 출판사에서 일하던 저자는 20대 중반 나이에 기회의 땅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으로 일터를 옮긴다.

저자는 IT업계 중심부에서 발견한 부조리와 과잉, 기이한 모습 등을 소개함으로써 보편적·시대적 고민을 녹여냈다. 1980년대 미 금융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탐욕의 상징이 됐듯 1987년생 밀레니얼 세대인 저자에게는 실리콘밸리가 그런 곳이었다.

전자책 업체와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저자는 "인터넷을 위해, 또 인터넷상에만 존재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1년에 8만 달러(약 9,000만 원), 9만 달러(약 1억 원), 그다음엔 10만 달러(약 1억1,200만 원)를 벌게 됐다"며 "인터넷 세계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의견과 잘못된 정보로 곪아 터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의 테크 업계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 젊은 부자들이 모인 기묘한 공간"이라며 당시 IT업계 종사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하는 동시에 "쌓여가는 부의 그늘 속에서 노숙촌은 점점 커져갔다"고 실리콘밸리의 빈부 격차 문제를 끄집어냈다.

비개발자의 비애도 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비엔지니어는 자신의 가치를 애써 증명해야 한다"며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공지능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장벽이었음에도 '소프트 스킬(소통·협업 능력)'은 언제나 과소평가됐다"고 적었다.

실리콘밸리의 남초 현상에 대해서는 "성차별과 여성 혐오와 성적 대상화는 노골적이진 않아도 벽지나 공기처럼 사무실 어디에나 존재했다"며 "자칭 페미니스트였던 나는 남자들의 잘난 자아를 쉬지 않고 떠받드는 일에 도가 튼 사람이 돼 있었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언캐니 밸리'. 애나 위너 지음·송예슬 옮김·카라칼 발행·404쪽·1만8,500원

'언캐니 밸리'. 애나 위너 지음·송예슬 옮김·카라칼 발행·404쪽·1만8,500원

결국 저자는 2018년 초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을 퇴사했다. 에필로그엔 "돈과 안락한 라이프스타일만으로는 일하면서 느끼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떨쳐낼 수 없었다"며 "번아웃과 지겨움, 간헐적으로 느끼는 유해함 같은 것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고 밝혔다.

사실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빅테크 기업들이 이미 공공의 적이 된 현시점에서는 IT업계에 대한 저자의 고발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의 지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부 고발서이자 성장일기 성격을 띠는 책은 막연히 떠올려 온 실리콘 밸리의 빛과 그림자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탐욕과 여성 혐오 등 IT업계의 문화를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문학적 질감으로 표현한 문체로 쉬이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유명 기업의 실명을 공개하는 대신 별명을 붙여 줬다. 페이스북이 아닌 '다들 싫다고 말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소셜 네트워크', 구글 대신 '마운틴뷰에 있는 거대 검색 엔진 회사' 등으로 부르는 식이다.

현재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이들은 물론 절제가 필요한 무비판적 인터넷 사용자들에게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책이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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