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두 얼굴의 광장에서 인생을 배우다

입력
2021.05.29 10:00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
<164> 시간에도 마모되지 않는 그때 그 광장

이란 이스파한의 이맘 모스크의 돔에서 내려다본 이맘 광장. 빈틈없는 도시에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다니. ⓒ강미승

광장은 명실상부 빈터다. 빈 공간이 사람들로 채워지고, 모이다 보니 작당도 늘어난다. 광장은 오늘이 다르고 또 다른 내일을 겸허히 맞이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광장에서 배운 건 인생도 그리 살라는 것. 진부함은 넣어두고 색다르게, 종종 생기 있게.

누구나 품어봄 직한 비장의 매력, 이란 이스파한 이맘 광장(Meidan Emam)

이맘 광장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강미승

이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칭송받는 이스파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적으로 예측 불허다. 도로에서 무자비한 끼어들기 주행이 예사지만, 받은 것 하나 없어도 열을 내어주는 이란인이 살아가는 도시다. 스스로 무질서한 이 도시를 닮았다고 여긴 나 조차도 치밀한 계산과 정리벽을 발산한 곳, 이맘 광장이다. 도시가 숨겨놓은 비장의 숲이었다.

규모만으로 이미 뒷걸음질칠 법하다. 남북으로 560m, 동서로 160m의 반듯한 직사각형 광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 다음이다. 동서남북으로 각 수호신이 있다. 남쪽에 이맘 모스크가 광장을 총괄하듯 어깨 근육을 펴고 있고, 동쪽의 셰이크로트폴라 모스크가 서쪽의 알리카푸 궁전과 마주보고 있다. 북쪽은 케이사리예 출입구를 통해 2㎞에 달하는 시장으로 연결된다. 2층 구조의 아케이드와 노고가 깃든 정원 및 분수는 잘 포장된 선물 박스 같다.

광장 안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몇 발짝만 떼면 밖은 전혀 딴 세상이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광장 안은 질서, 아케이드 쪽은 무질서의 세계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처럼 슬며시 괴기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누구에게나 남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하나쯤 숨겨놓고 있겠지. 이런 반전이 이맘 광장의 매력이다.

구경꾼들은 건축물 속으로 피신하고, 광장을 지배하는 건 현지인의 생기다. ⓒ강미승


넓은 규모 덕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정원. 마차가 유일하게 허용된 교통수단이다. ⓒ강미승


이맘 모스크의 타일은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다른 색감을 띈다. 1611년부터 19년간 땀을 쏟아낸 페르시아 건축의 백미. ⓒ강미승


광장에서 바로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시장통엔 대를 이어오는 장인의 상점이 이어진다. ⓒ강미승


혼란이 가르쳐 준 그 무엇, 모로코 마라케시 제마엘프나(Djemaa el-Fnaa)

광장에서 뿌리를 뻗은 작은 골목길. 광장은 모험의 중심이 되고 들락날락하는 재미가 시작된다. ⓒ강미승

첫인상은 비릿한 두려움이었다. 어쩌다가 새벽녘, 마라케시에서 마주한 맨 얼굴이었다. 붉은 수평선이다. 가늠할 수 없는 너비로 푸른 하늘과 붉은 기운이 고요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모습에 신기하리만큼 떨렸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적인 평화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전 9시가 지나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돌변했다. 가히 전쟁터다.

사실 제마엘프나 광장은 공개 처형장이기도 했다. 11세기경 죄인의 목을 댕강 잘라 군중에게 공포를 조성한 곳이었다. 이런 충격적인 역사의 단면을 제외하면 당시에도 이 광장은 수크(souk), 즉 시장이었다. 오랜 세월 장사꾼의 노하우가 축적된 만큼 오늘날 이곳은 ‘막가파식’ 시장형 광장이다. 호객행위에 질려 달리기에 가까운 질주를 해야만 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각종 묘기가 전투적으로 벌어진다. 뱀을 칭칭 감은 요술사,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을 파는 약장수, 그리고 이야기꾼과 마술사가 도처에 깔렸다. 잠시 딴청을 피우면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헤비메탈이 진동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도, 서라운드 소음이 끊임없이 들러붙는다. 여기는 어디, 난 누구? 40도가 넘는 열기와 혼란이 몸을 이끌어 간다. 당시의 그 ‘알 수 없음’을 다시 경험한다면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스스로도 지독하게 궁금하다.

막 잠에서 깨기 시작한 제마엘프나 광장. 어제가 아닌 오늘이 오고, 오늘이 아닌 내일이 열린다. ⓒ강미승


슬리퍼 바닥으로도 대지의 열기가 전이된다. 결국, 빠르게 걷거나 혹은 익숙해지길 기도하거나. ⓒ강미승


이 가방 장수에게 머플러를 주문해도 가능할 것 같은 시장. 그렇게 요상한 곳이다. ⓒ강미승


사진을 찍으려던 것뿐인데, 먼발치의 오렌지 주스 상인이 말을 걸었다. 외톨이에겐 이 광장이 특효약. ⓒ강미승


이를테면 인생의 궤적,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La Grand-Place)

시간대를 달리해 자주 들렸다. 해 질 무렵 광장은 최고의 빛을 발하고, 그림자를 낮게 받아 들인다. ⓒ강미승

머릿속에 떠올리는 광장의 이미지는 대개 넓은 공간이다. 양팔을 벌리고 누구나 환영하는 모양새다. 그랑플라스는 그런 관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좁은 길을 따라 난 상점이나 식당에 한눈을 팔다 보면 느닷없이 나타난다. 그것참,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하늘이 뻥 뚫리고 첨탑이 솟아있고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요새를 만난 것처럼 고상하고 웅장한 자태 앞에서 입을 쩍 벌렸다.

그랑플라스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품은 (이름과 달리) 작은 광장이다. 15~19세기 건축물이 철통방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17세기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대항한 프랑스의 보복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바 있다.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시청과 왕의 집, 주택 몇 채를 근간으로 곧바로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위기는 기회였다. 본 모습으로 복구하되, 광장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확장했다.

현재 광장으로부터 일곱 가지를 친 거리를 제외한 건축물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고딕과 바로크 건축 양식이 혼재하고, 공공건물과 주거지가 이웃이다. 덕분에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 가운데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은 벨기에의 미적 감각을 몇 단계 끌어올린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빅토르 위고는 이 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찬양했다. 그리움을 먹고 사는 여행자의 입장에선 오늘도 이리 건재하여 고맙다. 다시 만나도 그 모습이길.

이왕이면 꼴린느가(Rue de la Colline)를 통해 첫 대면 하길. 감동의 폭이 다르다. ⓒ강미승


96m의 첨탑이 치솟은 시청사의 일면. 건축물을 하나의 신앙이자 작품으로 여긴 증거다. ⓒ강미승


동화 속으로 걸어간 듯한 광장. 1층에 자리 잡은 맥주 또는 초콜릿 박물관과 카페 등이 발길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강미승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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