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종교·언론 전쟁' 치닫는 이·팔 유혈충돌

입력
2021.05.17 18:3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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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200명 육박… 팔레스타인 주민 생존 위기
이슬람 국가들 공동 행동 움직임… 중동 정세 불안

16일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건물 잔해 속에서 생존자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16일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건물 잔해 속에서 생존자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스라엘은 17일(현지시간)에도 0시를 넘기자마자 어김없이 가자지구에 포화를 쏟아부었다. 전날 팔레스타인인 42명이 몰살됐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자지구는 이미 쑥대밭이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긴급히 대피소로 몸을 숨겼지만 물과 식량, 전기가 끊겨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이스라엘을 싸고도는 미국과 서방 동맹국에 맞서 이란ㆍ터키 등 이슬람 국가들은 본격적으로 ‘반(反) 이스라엘 전선’ 구축에 나섰다. 종교 갈등이 자칫 중동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이 8일째 계속되면서 인명 피해는 이제 ‘학살’ 수준에 이르렀다. AP통신에 따르면 전날까지 가자지구에서만 어린이 55명, 여성 33명을 포함해 최소 188명이 죽고 1,230명이 다쳤다. 이스라엘에선 8명이 숨졌다. 하마스가 이스라엘로 쏜 로켓포는 일주일간 3,100발이 넘고, 이스라엘은 전투기를 동원해 수백 차례 공습을 단행했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국경만 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전시 상태나 다름없다. 가자지구 응급구조대원 사미르 알 카티브는 “2014년 ‘50일 전쟁’ 당시에도 이 정도로 파괴가 심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무력 충돌이 끝모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면서 이ㆍ팔 교전이 명백한 ‘전쟁범죄’라는 비판도 잇따른다. 라마단 기간 이스라엘 군경과 팔레스타인 시위대의 충돌을 계기로 하마스가 먼저 무력 도발을 감행했으나,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20배나 많고 어린이 희생자가 4분의1이나 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합법성 논란과 책임 공방도 불붙고 있다. 다포 아칸데 옥스퍼드대 국제법 교수는 “공격으로 얻는 군사적 이점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민간인 피해를 비교해 봐야 한다”며 “폭격 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예방 조치를 취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인도주의 위기’는 이미 현실화했다. 가자지구 해수담수화 공장이 폭격 여파로 가동을 멈춰 25만명이 식수난을 겪고 있고, 전기선 10개 중 6개가 끊어진 탓에 생활 전기는커녕 병원에서 환자 치료에 쓸 산소마저 못 만드는 지경이다. 무력 충돌이 발발한 10일 이후 국경이 막히면서 연료와 구호물품 공급도 끊겼다. 이미 가자지구 인구 75%가 식량을 원조에 의지하는 상황에서 굶주림 문제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린 헤이스팅스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은 “이스라엘 당국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은 유엔과 인권단체들이 연료, 식량, 의약품을 들여갈 수 있도록 즉각 국경을 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엔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200만명 중 3만4,000명이 집을 떠나 40여개 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또 다른 위협 요인이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 가자지구 책임자 마티아스 슈말레는 “신규 감염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군의 지상 침공이 시작되면 병원은 감당 불가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도 “양측 간 충돌은 특히 어린이와 젊은 세대에게서 인권 침해와 빈곤,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15일 해외 언론이 다수 입주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내 '잘라 타워'가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붕괴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15일 해외 언론이 다수 입주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내 '잘라 타워'가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붕괴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정세도 심상치 않다. 이슬람권 최대 국제기구인 이슬람협력기구(OIC)는 긴급 회의를 열어 이스라엘 규탄 결의안을 채택했다. OIC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전체 이슬람 공동체의 종교적 감수성을 고의로 자극했다”며 ‘공동 행동’도 예고했다. 이란과 터키 정상도 전화통화에서 “이슬람 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스라엘과 인접한 레바논, 모로코, 파키스탄 등에선 연일 반이스라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양측 간 해묵은 민족ㆍ종교 갈등이 국경을 넘어 국제전 양상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적대 행위는 언론 자유도 위협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AP통신과 카타르 국영 알자지라 방송 등 해외 언론사가 입주한 건물을 폭격하면서 ‘하마스 연루 가능성’을 근거로 들었지만, 뚜렷한 물증은 내놓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는 가자지구 인권 침해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샐리 버즈비 AP 편집국장은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했고, 언론자유감시단체 국경없는 기자회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전쟁범죄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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