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기억은 사라져도 자존심은 남는다

입력
2021.05.16 22:00

©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여주인공은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며 이야기한다. "기억이 사라지는데 행복이 무슨 소용이고 사랑은 또 뭐야? 다 잊어버릴 텐데."

퇴행성 뇌질환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박사에 의해 최초로 보고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젊었을 때 발병하는 것은 극히 드물며 일반적으로 65세가 넘어야 진단이 가능하고 이후 서서히 진행되는 질환이다. 초기에는 주로 단기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다가 몇 년에 걸쳐 언어기능이나 판단력 등 다른 인지기능에 이상이 동반되며 결국 뇌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치매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우리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대의학으로는 아직까지 예방도, 치료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지, 치매의 임상적 진행을 다소 늦추거나 문제행동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물치료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조기 진단을 위해 스스로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모시고 오는 시점은 문제행동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렇지만 외래에서 만나게 되는 치매 노인의 대부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가족들을 더욱 아프게 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마음에는 안타까움과 고단함의 양가감정이 늘 공존한다. 그들의 과거 기억 속에 존재하는 환자의 모습과 현재의 돌발적인 행동들이 뒤섞여 가족 구성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모가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말기암에 걸렸다면 언젠가는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게 되겠지만 대부분의 치매 노인들은 기억을 잃어가다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면담을 하다 보면 가족들은 치매로 인해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까지는 힘들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자신의 돈을 훔쳐간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만큼은 무척이나 서운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정작 치매에 걸려 주위 사람을 의심하는 당사자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격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조리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 어쩌면 치매를 앓게 되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믿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을 반성하면서 오직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세상을 평가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노련한 방식이라는 것을 의심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억이 없어질수록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은 잊어버리지만 감정은 그것을 보상하고자 한다. 치매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니체의 이야기를 인용해 변명한다면 '내가 그 일을 저질렀어'라고 기억이 말하지만 '아니야, 내가 그랬을 리 없어'라고 자존심이 바로 반박한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져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 노인들이 치매의 문제행동에 대하여 지적하면 화를 내고 부정하는 것은 아마도 기억은 사라져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존심은 끝까지 간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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