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살인, 인플레... 참상의 도시에서 피어난 베네수엘라 문학

입력
2021.05.14 04:30

10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델리오에서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미국과 멕시코 접경에 있는 리오그란데강을 건너 미국에 이민을 시도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사회 혼란이 이어지면서, 최근 몇 년 사이 540만여 명이 생존을 위해 고국을 등졌다. 델리오 로이터=연합뉴스

3월 8일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역대 발행 지폐 중 최고액권인 백만 볼리바르 지폐를 새로 발행했다. 무려 7자리에 달하는 이 지폐 한 장의 가치는 약 0.53달러, 한화로는 600원 수준에 불과하다. 베네수엘라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는 279만7,500볼리바르가 필요하다.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나라의 현실이다. 베네수엘라 작가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는 그의 책 ‘스페인 여자의 딸’에서 이 상황을 ‘가치 없는 마천루’로 묘사한다.

“지폐는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뭐든 사려면 큰 돈다발이 필요했다. 탄산수 한 병부터 껌 한 통까지 원래 가격의 열 배에서 열두 배까지 줘야 살 수 있었다. 돈의 단위가 도시 규모를 띠기 시작했다(…) 기름 한 병을 사려면 100볼리바르 지폐로 탑 두 채를, 가끔 치즈 한 덩이라도 사려면 세 채를 쌓아올려야 했다. 가치 없는 마천루, 그게 국가 화폐였다.”

‘스페인 여자의 딸’은 국내에는 두 번째로 번역되는 베네수엘라 문학이다. 1978년 국내 번역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가예고스의 ‘도냐 바르바라’(1929) 이후 무려 40여 년 만이다. 세계 제1위의 석유 매장량을 바탕으로 한때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남미에서 가장 높았을 정도로 부자 나라였지만, 현재는 최악의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상황을 생생히 그린다. 전 세계 26개국에 번역 출간됐으며 국제문학상, 그랑프리드레로인상을 수상했다. 리베라토르상,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는 등 스페인어권 문학 사상 전례 없는 출판 신드롬을 일으켰다.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는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그린 데뷔작 '스페인 여자의 딸'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Jeosm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절대적 빈곤과 잔혹한 폭력이 일상이 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30대 후반의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참상의 도시를 탈출하는 짧은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개요를 지탱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숨막힐 정도로 생생하다.

소설은 "엄마를 묻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아델라이다의 집은 ‘보안관’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뒤다. 보안관은 정부에 헌신하는 대가로 막강한 권력과 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이들로, “나무를 베듯 우리를 잘라내고” “개처럼 우리를 죽이는” 이들이다.

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은행나무 발행. 332쪽. 1만5,000원

눈앞에서 집을 빼앗긴 아델라이다는 이들을 피해 우연히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 불리던 옆집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우로라의 시신과 그의 스페인 국적 여권을 발견한다. 아델라이다는 살아남기 위해 아우로라의 여권을 이용해 스페인으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서른여덟의 문학과 언어를 전공한 출판 편집자 아델라이다 팔콘은, 그렇게 관광학과 비서학 학위를 지닌 마흔 일곱 살의 요리사 아우로라 페랄타가 된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 있었다. 총상, 납치, 강도. 몇 시간이고 지속되는 정전에 이어 해가 지면 영원한 어둠이 찾아”오는 소설 속 문장이 암시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는 없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도 못하게 취급받는 베네수엘라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빛을 발한다. 아델라이다와 아우로라를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개 여성이다. 이웃 여자들, 먼 곳에 있는 친척들, 어린 시절 친구들까지. 고향을 떠나 새로 정착한 곳에서 희망을 붙들고 끝끝내 삶의 싹을 틔웠던 그들의 강인함은 세대를 이어 그들의 딸에게도 전수된다. 소설 제목이 ‘스페인 여자’가 아닌 ‘스페인 여자의 딸’인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중산층 거주 지역 담벼락에 "이게 나라냐?"라는 낙서가 쓰여 있다. 카라카스 AP=뉴시스

결과적으로,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가 되어 베네수엘라를 떠난다. 작가 역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베네수엘라를 떠나 현재는 스페인에 정착한 상태다.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은 배고픔과 죽음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한다. 소설에선 주인공이 참상의 도시를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은 책장을 덮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2014년 이후 베네수엘라 국민 약 500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지난해 12월에는 이웃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로 가던 베네수엘라 배가 침몰해 이민자 20여 명이 숨지기도 했다. ‘스페인 여자의 딸’은 저 멀리, 죽음을 뚫고 살아남아 우리에게 겨우 도착한 생존의 기록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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