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할수록 곁에 둬라" 혐오에 대항하는 '접촉'의 힘

입력
2021.05.13 18:00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난해 뉴욕 도심에서 벌어진 가운데 한 흑인 여성과 백인 경찰이 포옹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두 사람의 공감이 만들어낸 치유의 현장이다. 뉴욕=AP 뉴시스

“동성애자는 소아성애자 아닌가요.” 아일랜드 남쪽 작은 도시 매크룸에서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핀바르 오브라이언은 열렬한 동성애 반대론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친구였던 한 남성으로부터 2년간 성폭행을 당했다.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남자’ 그리고 ‘아동성폭행’.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핀바르는 ‘게이’는 소아성애자라고 단정 지었다. 그의 아픔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50대 가장이 돼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늘 먼저 피하고, 달아나다 보니 핀바르는 살면서 동성애자를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26세의 게이, 크리스 라이언스가 먼저 다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사람은 2013년 아일랜드 정부가 임의로 시민 100명을 뽑아 만든 ‘시민의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 헌법은 동성 부부를 금지하고 있었다. 시대는 변화를 요구했지만, 입김 센 가톨릭교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부담이 컸던 정부가 낸 아이디어가 ‘시민의회’였다. 대표성을 띤 국민들에게 공을 넘긴 것이다.

첫 회의가 열리던 날, 두 사람은 하필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모히칸 스타일 머리, 아이라인, 손톱에 매니큐어까지. 크리스는 평소보다 더 강한 외모로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재빨리 자리를 뜨려던 핀바르를 크리스가 붙잡았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놨다. 동성애자임을 처음 고백했을 때, 어머니조차 자신을 소아성애자로 여겼고 아버지는 남들에게 소문날까 전전긍긍했다는 아픔을.

아일랜드 시민의회에서 대표자로 뽑힌 100명의 시민들이 연금 개혁 관련 안건 투표를 위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출처 더아이리시타임스

대화는 계속됐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반대론자를 넘어선 다양한 주제가 오갔다. 핀바르의 손자, 크리스의 정보통신(IT) 직업, 대통령 임기, 선거권 연령 문제까지. 핀바르는 차츰 깨닫게 됐다. 크리스는 범죄자가 아니라 평범한 청년일 뿐이란 것을.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지입니다. 사람들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더 잘 알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됐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요.” 시민의회 중 79명이 동성 부부 금지 헌법 개정에 찬성했다. 2년 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첫 나라가 됐다.

핀바르가 평생 동안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바꾼 데는 크리스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바로 ‘접촉’의 힘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혐오 없는 삶’에서 혐오와 증오에 대항하는 백신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제안한다. 편견 연구의 대가로 손꼽히는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1954년 발표한 ‘접촉가설’에 따른 것이다. ‘적대적 사이라고 해도 가까이 있을수록 편견은 줄어든다’는 이론은 다행히 현실에서도 들어맞았다.

혐오 없는 삶·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이승희 옮김·판미동 발행·312쪽·1만7,000원

책은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 사례집이다. 만남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난민 추방을 외치던 노부부가 집시 가족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네오 나치주의자가 ‘외노자놈(외국인 노동자를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멸시하던 팔레스타인 남성과 감옥에서 친구가 됐다. 미디어가, 정치인이 만들어낸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걷어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 공감한 덕분이다.

그러나 이런 마법 같은 순간을 일반적으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이들은 나와 비슷하거나 닮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렇다. 비슷한 학력, 비슷한 직업과 수입,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비슷한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 끼리끼리는 더 심해졌고, 나와 비슷한 부류를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장벽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래서 저자는 접촉의 제도화를 제안한다. 우연이 아니라 만남을 강제할 수 있도록 사회가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는 것.

책 마지막 장을 장식한 아프리카 국가 보츠와나의 사례는 꽤 흥미롭다.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 중 내전이나 분쟁 없이 하나의 국민국가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나라 역시 40여 개 다양한 부족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은 싸우지 않았다. 비결은 역시 '적극적인' 접촉이었다. 정부는 국가 건설 초반 공무원, 교사, 의사 등의 근무지를 순환시키는 걸 의무화했다. 일부러 다른 부족, 다른 지역과 섞이게 하려는 조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타부족 출신끼리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부족의 정체성 자체가 옅어졌다. 통합의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저자는 강조한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예를 들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해선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줘야 한다.” 책은 혐오 없는 삶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눈앞에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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