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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지역 자연경관 좋아했다”…낯 뜨거운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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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 등이 기증자, 기증품 소장처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경쟁적으로 뛰어들다 보니 억지스러운 명분도 속출하는 양상이다.
12일 현재까지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지자체 및 지역단체는 10곳에 달한다. 특정 지역을 선정해 국립기관 분관 형태의 이건희 미술관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또 기증품 소장처의 분관이 아닌 이건희 미술관을 별도로 짓는 일은 사실상 기증품 소장처로부터 기증된 미술품을 회수하거나 장기 임대 형식으로 가져와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더욱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기증과 관련, 기증한 정신을 잘 살려서 국민들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라.”
지난달 28일 문재인 대통령 발언
지난달 28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 측이 개인 소장 미술품 2만3,0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한다고 발표한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 마련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지자체들은 앞다퉈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지역구 국회의원, 지역 신문 등도 자기 지역에 반드시 미술관을 유치해야 한다며 유치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경쟁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미술관 유치로 관광객이 몰려오면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쇠퇴해가던 스페인의 지방 공업도시 빌바오는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하며 경제 부흥을 꾀한 바 있다.
문제는 정작 기증자와 미술품을 기증받은 곳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증받은 미술품을 어떻게 하면 국민에 잘 선보일지에 관한 고민도 없다. ‘구체적인 계획은 모르겠고, 미술관을 지을 거면 우리 지역에 지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미술계의 한 인사는 “평소엔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다가, 대규모 기증 사례가 나오자 날로 먹으려고 앞다퉈 뛰어드는 모습이 우습다”고 꼬집었다.
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해 내세우는 이유도 비웃음을 사고 있다. ‘고인이 평소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좋아해 자주 방문했다(여수)’ ‘이건희 회장의 부친이 다닌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진주)’ ‘이건희 회장 소장품 중 시와 연관이 있는 장욱진 화백의 작품이 있다(세종)’ ‘이건희 회장이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이 호암미술관을 용인에 건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용인)’ ‘세계 미술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중국과 가깝다(새만금)’ ‘삼성이라는 글로벌 기업 이미지가 세계 5위 인천국제공항을 보유한 영종국제도시와 잘 맞는다(인천)’ 등이다.
현재 거론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미술품을 기증받은 국립 기관의 분관을 지역에 세우는 일이다. 우선 이 방안은 기증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이 분관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어서, 작품 소유권 문제에서 자유롭다. 다만 유치 경쟁이 과열된 상황에서 특정 지역 한 곳을 선정하는 일이 까다로운 데다 미술관 건립에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돼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국립 기관의 분관 형태가 아닌 별도의 운영 주체가 따로 미술관을 세우는 일은 이보다 어렵다. 캐슬린 김 법무법인 리우 변호사는 “기증자, 수증 기관의 동의가 있을 경우 기증품 회수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현 상황에선 어려워 보인다”며 “기증품을 장기 기탁 또는 임대하는 것도 기증받은 곳의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앞서 유가족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이중섭 미술관, 박수근 미술관 등에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했다.
각 지역에 기증된 작품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족 측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족 측이 상당 시간을 할애해 기증할 곳을 정하고, 각 기관의 특색에 맞는 미술품을 선정해 기증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담당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의견을 수렴하는 중이다. 최선의 안이 무엇인지 기증자의 뜻을 잘 살펴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관광산업을 위한 미술관 유치 경쟁으로 변질된 논의를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미술시장연구소 소장)는 “정치, 건설, 지역축제 등에 비중을 두던 지자체와 단체장, 의원들이 미술을 통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미술계 인사도 “1회성 해프닝으로 끝낼 게 아니라, 지역에 있는 미술관을 성숙시킬 수 있는 논의로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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