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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에 파란색 쥐약... '신탄진 살묘남'이 돌아왔다

입력
2021.05.09 13:00
수정
2021.05.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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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서 길고양이 사체 옆 '파란색 닭고기' 발견
지역 돌보미들 "신탄진 살묘남 범행과 유사"
13년 동안 수사 기관의 미온적 대처에 실망
돌보미들 증거 확보 위해 잠복까지 나섰으나
경찰은 신고 6일 만에야 사건 현장 다녀가
"동물 학대 하찮게 보는 수사기관 인식 드러나"

지난달 13일 대전 석봉동의 한 폐가에서 파란색 쥐약이 묻은 닭고기와 함께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다. 지역 돌보미들은 범행 수법으로 미뤄, 지난 13년 동안 신탄진 일대 길고양이를 죽이고 다녔던 일명 '신탄진 살묘남'의 범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발견된 범행 사진.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지난달 13일 대전 석봉동의 한 폐가에서 파란색 쥐약이 묻은 닭고기와 함께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다. 지역 돌보미들은 범행 수법으로 미뤄, 지난 13년 동안 신탄진 일대 길고양이를 죽이고 다녔던 일명 '신탄진 살묘남'의 범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발견된 범행 사진.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지난달 13일 오후 5시 20분 대전 석봉동의 한 폐가에서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인근의 고양이 돌보미 A씨가 "녀석이 나흘 넘게 안 보인다"며 일대를 수색했는데, 고양이는 끝내 싸늘한 사체로 돌아왔습니다.

녀석은 A씨가 지난해 대전 길고양이 사업을 통해 중성화(TNR)시킨 고양이입니다. 길고양이가 중성화됐다는 것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녀석도 돌보미가 각별하게 여겼던 고양이 중 한 마리였습니다.

죽은 고양이에게 다가가기도 전, 돌보미는 쓰레기 더미 위에 놓인 고양이 이빨 자국이 찍힌 닭고기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닭고기들은 이상하게도 쌀가루 크기만 한 파란 가루에 버무려져 있었습니다.

대전 지역 고양이 돌보미들 "'신탄진 살묘남'이 돌아왔다"

2019년 동물구조119 활동가들이 쥐약 묻은 닭고기를 치우자 '신탄진 살묘남' 김모씨는 "내 물건인데 왜 치우냐"며 저항하고 있다. 동물구조119 유튜브 계정 캡처

2019년 동물구조119 활동가들이 쥐약 묻은 닭고기를 치우자 '신탄진 살묘남' 김모씨는 "내 물건인데 왜 치우냐"며 저항하고 있다. 동물구조119 유튜브 계정 캡처

파란 가루로 버무린 닭고기. 대전 지역 고양이 돌보미들은 지난 13년 동안 대전 신탄진 지역 일대 길고양이들을 죽이고 다녔던, 이른바 '신탄진 살묘(殺猫)남'의 범행이라 확신합니다. 파란 닭고기가 그의 '시그니처(범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파란 가루의 정체는 쥐약입니다. 새끼고양이는 쥐약을 먹으면 피를 토하며 즉사합니다. 그런데 성묘(成猫)는 쥐약을 먹고 바로 죽지 않습니다. 돌보미들에 따르면, 계속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지막 순간엔 근육이 강직된 채 숨을 거둡니다. 그만큼 쥐약을 먹이는 것은 잔인한 범죄입니다.

신탄진 살묘남이라 불리는 70대 노인 김모씨는 이미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2016년 벌금 70만 원형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닭고기에 쥐약을 묻혀 고양이를 죽인 혐의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싹싹 빌었던 것도 잠시, 그는 처벌 이후 오히려 차에 쥐약과 닭고기를 싣고 다니며 범행 장소를 넓혔습니다. 그러다 돌보미에게 적발돼 2018년 다시 기소 위기에 놓였죠. 그도 범행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그를 '불기소 처분' 했습니다.

13년간 길고양이 1,000마리 죽인 것으로 추정돼

과거 대전 신탄진 일대에서 발견된 고양이 사체.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과거 대전 신탄진 일대에서 발견된 고양이 사체.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쥐약을 먹고 죽은 고양이의 사체가 없다', 즉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불기소 이유였습니다. 기수범만 처벌하는 법이 있고, 미수범까지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요. 동물보호법은 미수범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살인은 미수범도 처벌합니다.

김씨는 이후 더욱 '뻔뻔하게' 범행을 이어갑니다. 고양이 돌보미에게 범행 현장이 발각되더라도 당당히 대꾸합니다.

"그래 내가 놨어. 고양이 죽은 거나 찾아와"

그렇게 김씨가 죽인 고양이는 13년 동안 1,000마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양이 돌보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산한 숫자입니다.

지역 돌보미들이 그의 범행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지난해 8월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돌보미들은 13년 동안의 행적에 미뤄 짐작하건대, 반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을 뿐 어디선가 범행을 지속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섬뜩해진다고 합니다.

김씨는 도대체 왜 고양이를 죽이는 걸까요? 그와 면담도 하고 오랫동안 대화도 나눈 임영기 동물구조119 대표에 따르면, 처음엔 "고양이가 너무 많다. 울음소리도 너무 크고 지붕 위로 다녀서 도저히 잠을 못 자겠다. 못 살겠다"라고 호소했답니다.

그래서 임 대표와 지역 돌보미들은 구청에 전화해서 고양이 TNR을 요청하거나 김씨 집 근처 고양이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막는 작업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미가 없었죠. 그의 범행은 계속됐습니다.

경찰 미온적 태도에 시민들이 직접 추적 나서

그를 2008년부터 '추적'해온 고양이 돌보미 신혜경(55)씨는 "이 정도면 중독된 것 같다. 다리가 부러져도 나갈 사람"이라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신씨는 그의 범행이 10년 넘게 지속되는 건 경찰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신고를 해도 김씨가 "닭고기 안 놓았다"고 하면, 경찰이 신씨를 보고 "안놨다는데요"라고 한 게 벌써 14년째 이어지는 식이라고 했습니다.

신씨는 "신고를 하고 고발을 했으면 경찰은 김씨 집이나 차에 범행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을 할 수가 있잖냐"고 되물으며 "10년 넘게 똑같은 수법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김씨의 집도 들여다보지 않는 게 말이 되나. 금은방이 털려도 이러진 않을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신씨가 틈날 때마다 '잠복 근무'까지 하며 김씨의 범행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경찰에 대한 믿음이 0%로 수렴했기 때문입니다.

김씨가 마트에서 '떨이 세일'하는 밤늦은 시간 닭을 사는 모습, 차에서 쥐약을 버무리는 모습, 검은 봉지를 들고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신씨는 모두 직접 확인했습니다.

쥐약 묻은 닭고기를 길고양이 길목에 놓는 결정적 순간은 영상으로 남겼고,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도록 즉각 신고도 했습니다. 한 차례 벌금을 물린 것도 신씨의 활약 덕분입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신고에도 김씨의 범행을 끊지 못했습니다. 신씨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 법이 나를 처벌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계속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습니다.

돌보미들 "이번엔 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찰은

지난달 13일 사망한 고양이를 돌보던 돌보미는 같은 달 22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살묘남의 범행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지난달 13일 사망한 고양이를 돌보던 돌보미는 같은 달 22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살묘남의 범행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최근 적발된 범행을 계기로 신씨를 비롯한 지역 돌보미들은 김씨의 범행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다시 잠복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꼭 증거를 잡아서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겠다"는 단순한 소망에서 비롯된 결의입니다.

고양이를 잃은 돌보미 A씨는 경찰 신고는 물론, 공론화를 위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글('10여 년간 고양이를 살해해온 신탄진 살묘남을 막아주세요')도 올렸습니다. 청원 마감까지 17일 남은, 5일 오후 3시 현재 5만2,000여 명이 청원에 참여했습니다.

A씨는 고양이가 죽은 자리 근처에 며칠 동안 서 있으면서 살묘남 김씨를 목격했습니다. 김씨는 빨간 차 안에서 창문만 내리고 주변 눈치를 보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30분만에 되돌아와 현장을 다시 훑어보고 가기도 했습니다. 또 범행장소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A씨는 그러나 그를 목격하고도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접었습니다. 경찰이 김씨의 집에 찾아가 "당신이 또 그랬냐"고 물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찰 때문에 살묘남이 당분간 몸을 사리지 않겠나"며 잠복을 그만뒀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신고자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불신을 키우는데 한몫했습니다. 수사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가뜩이나 바쁜데 이런 일로 전화하면 안된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검 결과 죽은 고양이의 몸에서 쥐약 성분이 나왔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합니다.

A씨는 "신고 6일 후에야 경찰이 사고 현장에 다녀갔다. 그것도 전날 기자가 경찰서를 다녀간 탓에 마지못해 나온 것 같다"며 "10년 넘게 못잡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니겠나"고 했습니다.

그렇게 수사가 제자리 걸음을 걷는 동안 신씨가 돌보던 고등어 무늬 고양이 한 마리도 죽었습니다. 지난달 27일 파란색 닭고기를 발견하고 바로 치웠는데, 이튿날 그 자리에서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신씨는 고양이가 이미 닭고기를 먹어버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수사기관이 동물학대 사건을 대하는 인식이 문제"

14년째 '신탄진 살묘남'을 쫓고 있는 고양이 돌보미 신혜경(55)씨가 돌보던 고등어 무늬 고양이도 지난달 28일 사체로 발견됐다. 신혜경씨 제공

14년째 '신탄진 살묘남'을 쫓고 있는 고양이 돌보미 신혜경(55)씨가 돌보던 고등어 무늬 고양이도 지난달 28일 사체로 발견됐다. 신혜경씨 제공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피엔알(PNR) 김슬기 변호사는 "결국 수사기관의 적극적인 수사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했습니다. "피해를 본 게 길고양이가 아닌 사람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도 했습니다. 살묘남 사건은 동물학대를 하찮게 보는 수사 기관의 인식을 드러내는 대표적 예라는 의미입니다.

김 변호사는 "최근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사례도 생기고 과거보다 확실히 나아지고 있는 건 맞지만 (10년 넘게 같은 범행이 지속된다는 건)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것 아니겠냐"며 우리 사회 특히 수사기관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신탄진 살묘남'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쥐약에 버무린 닭고기.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신탄진 살묘남'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쥐약에 버무린 닭고기. 동물구조119 인스타그램 캡처

이번 길고양이 사건도 정말 '신탄진 살묘남'의 범행이 맞을까요? 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번 범행의 진범은 과연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요?

윤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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