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률 1위 이스라엘도 골칫거리가 있었다

입력
2021.04.25 10:00
수정
2021.04.25 13:46

NPR방송, 근본주의 유대교도 설득 과정 소개
"백신 맞으면 불임" 믿던 방역 훼방꾼 '하레디'
코로나 사망 임산부 비극이 극적 반전 이끌어

지난달 7일 이스라엘 브네이 브락의 한 회당에 마련된 코로나19 백신 접종 센터에서 한 '하레디'(극단적 정통파 유대교) 신자가 화이자 백신 주사를 맞고 있다. 브네이 브락=AP 뉴시스

지난달 7일 이스라엘 브네이 브락의 한 회당에 마련된 코로나19 백신 접종 센터에서 한 '하레디'(극단적 정통파 유대교) 신자가 화이자 백신 주사를 맞고 있다. 브네이 브락=AP 뉴시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에는 끔찍한 음모와 위험이 깃들어 있다.”

“백신만 맞지 않았다면 1,000명 넘는 사망자들이 성자로부터 보호 받았을 것이다.”

지난해 겨울 극단적 정통파 유대교도 ‘하레디’의 도시인 이스라엘 브네이 브락의 벽들은 백신 음모론이 담긴 포스터들로 빼곡했다. 인터넷을 ‘암’이라 부르는 유대교 근본주의 지역에서 포스터는 여론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위대한 랍비는 예방접종을 시킨다”, “백신은 위대한 구원” 같은 문구의 새 포스터로 덮었지만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포스터 전쟁’은 2주 만에 정부의 패배로 끝났다.

종교적 신념으로 똘똘 뭉친 하레디는 밀도 높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단체로 기도하고 랍비(유대교 율법학자) 장례식에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방역 훼방꾼’이라는 오명을 얻은 이유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결국 이들을 돌려세웠다. 이스라엘 보건부에 따르면 30대 이상 하레디의 80%가량이 백신 주사를 맞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22일(현지시간) 미국 NPR방송이 이스라엘 정부의 근본주의 유대교도 설득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스라엘 정부 앞에 놓인 난관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뜬소문부터 해소해야 했다. 국가 예방 접종 캠페인을 시작하기 1주일 전인 지난해 12월 13일, 이스라엘 보건부 관료들은 브네이 브락의 랍비들에게 백신 접종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상대로 돌아온 반응은 거절이었다. 백신을 접종하면 불임이 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당국은 랍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끈질긴 소통 말고는 달리 도리도 없었다. 겨우 랍비들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폐쇄성은 더 큰 장애물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스마트폰을 기피하는 하레디 공동체는 랍비 협회가 관리하는 핫라인(직통전화) 뉴스 시스템을 통해 코로나19 정보를 얻었다. 이스라엘 보건당국이 제공하는 정보가 파고들기 어려웠고, 백신을 맞으면 죽는다는 루머가 거침없이 유통됐다. 해법은 제거뿐이었다. 보건부는 랍비 협회를 설득했고 문제의 채널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올 2월 영국 런던의 존 스콧 백신 접종 센터에서 한 '하레디'(극단적 정통파 유대교) 랍비가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 주사를 맞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올 2월 영국 런던의 존 스콧 백신 접종 센터에서 한 '하레디'(극단적 정통파 유대교) 랍비가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 주사를 맞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불신이 누그러진다고 신뢰가 금세 강해지는 건 아니었다. 극적 반전은 한 임산부의 비극이 이끌었다. 2월 다섯째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던 오스나 벤 시트리트는 백신을 맞으라는 이스라엘 보건당국과 랍비들의 장려에도 백신 주사 맞기를 망설이다 끝내 코로나에 감염됐고, 감염된 채 출산을 강행했지만 아이와 산모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스나의 남편 예후다 벤 시트리트는 후회했다. 자기가 겪은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음모론자들에게는 오스나의 죽음이 헛소문을 더 빨리 멀리 퍼뜨리기 위한 연료였다. 오스나가 백신 접종 때문에 사망했다고 떠들어댔다. 예후다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레디 주요 언론과 인터뷰에 적극 나서 진실을 알렸고, 이스라엘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보건당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스나 가족의 허락을 받아 “오스나를 기리기 위해 예방 접종을 받으라”는 소셜 미디어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은 하레디 사이에 백신 접종 열풍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건강관리기구는 캠페인 뒤 임산부 대상 예방 접종률이 60%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얼마 전 출산한 루스 타빕은 “여태껏 백신을 둘러싼 소문들이 무성해 접종 받기가 두려웠지만 오스나 사연을 접한 뒤 주사를 맞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다.

예후다는 백신 맞기를 꺼리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집에 초대한다고 했다. 그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엄마 없이 아이들과 내가 함께 있는 상황을 보면 결심을 굳히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며 “백신이 해답”이라고 말했다.

NPR은 “이스라엘을 백신 접종률 1위국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요인은 정부의 공식 캠페인도, 랍비들의 촉구도 아니었다”며 “백신 주사를 맞지 않은 젊은 여성과 그의 아이가 결국 같은 무덤에 묻혔다는 사연이 어떤 캠페인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전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통계 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22일 기준 이스라엘의 백신 접종률은 62.1%(1차 접종 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23일 현지 언론은 전날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코로나 신규 사망자가 보고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홍승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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