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난민, 두 개의 늪에 빠진 칠레

입력
2021.04.11 10:00
25면

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 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10여 년 전에는 한국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따라야 한다더니 요즘엔 베네수엘라 꼴 날까 봐 걱정들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지난 2월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 이키케로 밀입국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주민들. AFP 연합뉴스

지난 2월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 이키케로 밀입국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주민들. AFP 연합뉴스


3월 말 칠레 정부는 관광객을 제외한 칠레 거주 모든 외국인에게도 코로나19 백신을 무료로 접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칠레에 거주하는 불법 체류자들은 물론 무료 백신 접종을 목적으로 칠레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는 백신 접종이 불가하다던 2월의 결정을 번복한 것이다. 실제로 페루의 한 방송에서는 칠레에서 무료 백신을 접종받는 방법을 상세히 보도하는가 하면, 미화 500달러 정도면 칠레로 '백신 관광'을 갈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후, 당시 칠레의 바첼렛 대통령은 아이티 난민의 입국을 허용했다. 같은 해 칠레는 중남미 최초로 OECD에 가입했다. 이웃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아 오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칠레 거주 외국인들의 수는 베네수엘라(약 46만 명), 페루(약 24만 명), 아이티(약 19만 명), 콜롬비아(약 16만 명), 볼리비아(약 12만 명) 순으로 주변 국가의 이민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불법이든 합법이든, 칠레의 구석구석에서 살길을 도모했다.

2019년 10월 칠레에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이후 칠레의 실업률은 2019년 10월에 7.1%, 2020년 3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에는 13.1%까지 치솟았다. 이민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일자리를 잃었다. 거처를 잃은 이들은 산티아고 시내 곳곳에 텐트촌을 이뤘다. 추적 검사는 거의 불가능했다. 사생활 보호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으로 휴대폰 실소유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와이파이만 빌려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도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불법 체류자의 수를 파악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민자들이 생겼다. 여행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수백 명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페루 사람들은 자국 대사관과 영사관 앞에 진을 치고 귀국 교통편 마련을 요구했다. 버스를 타고 30시간 가까운 여행 끝에 볼리비아로 돌아갔으나 국경이 닫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돌아가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다시 칠레로 발길을 돌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의 국경을 넘어 밀입국하려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칠레 정부는 국경 지역에 군사 배치를 허용했다.

2020년 칠레의 GDP는 2019년에 비해 약 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3월까지 실업률은 10개월 연속 두 자리를 웃돈다. 곳간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재난지원금 지급도 수월하지 않다. 칠레 정부는 지난해 7월과 12월, 올해 4월 등 세 번에 걸쳐 연금의 10%씩을 미리 인출할 수 있도록 법안을 통과시켰다.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백신 접종을 허용하는 동시에 불법 체류자 단속과 추방도 강화하고 있다. 불법 체류자의 자녀들도 어린이집에 자동으로 등록할 수 있는 규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 무력 충돌을 피해 베네수엘라에서 건너오는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던 콜롬비아 정부는 결국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수엘라 야당은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는 칠레를 비난했다. 인구 2,000만 명도 안 되는 칠레의 누적확진자는 4월 초 100만 명을 넘어섰다. 자국민을 보호할 여력이 안 되는 나라, 내 나라 사정도 어려운 판에 남의 나라 사람들까지 몰려드니 난감한 나라. 이웃 나라는 나을까, 어디에도 등댈 곳 없이 떠도는 사람들. 인권을 생각할 겨를도, 별다른 대책도 없는 중남미에서 코로나19만 활개를 치고 있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서울대 규장각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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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정칠레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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