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민족주의의 두 얼굴

입력
2021.04.0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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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조지아 국가 통일의 날

1989년 조지아 트빌리시 학살의 희생자들. 조지아의 민족주의는 압하스-오세트인에 대한 탄압의 동력이다. 위키피디아

1989년 조지아 트빌리시 학살의 희생자들. 조지아의 민족주의는 압하스-오세트인에 대한 탄압의 동력이다. 위키피디아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캅카스의 조지아(옛 그루지아)는 지정학적 불리 때문에 기원전 그리스의 침략 이래 로마와 비잔틴제국, 몽골제국의 침략 및 분할 통치를 받았고, 1936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 변방의 작은 다민족 국가지만, 조지아 시민들의 기를 살려준 인물이 있었다. 조지아 고리 출신인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1924~1953 집권)이었다. '도살자'라는 칭호가 무색한 잔혹한 통치자였지만,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영웅이자 '조지아의 위대한 아들'이었다.

러시아 출신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脫) 스탈린 정책은 조지아의 젊은 민족주의자들에겐 공화국과 인민에 대한 모욕이었다. 스탈린 사망 3주기 기념행사가 열린 1956년 3월 6일, 수도 트빌리 도심 스탈린 기념비 앞에 모인 일부 청년들이 흐루쇼프의 모욕에 항의하며 술병을 깨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난동이 반 흐루쇼프 시위로, 스탈린주의 독립 및 연방 탈퇴 요구로 격화됐다. 3월 9일 지역 수비대는 전차까지 동원한 난폭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수백 명이 숨졌고, 수백 명이 다쳤고, 수많은 이들이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1956 트빌리시 폭동, 또는 3월 9일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그들 1956년의 청년 민족주의자들이 33년 뒤인 1989년 4월 9일의 '2차 트빌리시 폭동(대학살)'의 주역이었다. 고르바초프 개혁·개방정책으로 발트3국과 중앙아시아 카자스흐탄 등이 연일 독립봉기를 일으키며 연방군과 충돌하고, 모스크바의 통제력이 표나게 약화하던 때였다. 조지아 시위대는 4월 9일 연방군이 휘두른 삽과 각목에 19명이 숨졌다. 그 중 17명이 여성이었다. 1991년 조지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투표율 90.5%, 찬성률 99%로 독립했고, 비극의 4월 9일을 국경일인 '국가 통일의 날'로 제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민족주의는 조지아 내 소수민족인 오세트 및 압하스인들의 분리독립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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