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업고 달려가 오디션' 인기 역주행, 라미란의 매력

입력
2021.03.17 07: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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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라미란은 단역과 조연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으며 주연으로 발돋움했다.

배우 라미란은 단역과 조연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으며 주연으로 발돋움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의 주인공 금자(이영애)는 친절한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이 교도소 동료들이었다. 금자는 출소 후 한 명 한 명 찾아가 복수를 위해 어려운 부탁을 한다. 김부선과 이승신 등 유명 배우들이 금자의 친구들을 연기했는데 오수희 역을 맡은 배우는 낯설었다. 그가 “왜 이렇게 눈을 시뻘겋게 칠하고 다녀?”라고 물으면 금자가 “친절해 보일까 봐”라는 명대사로 응답한다. 서른 살 배우 라미란이 충무로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다. 서늘한 듯 정감 있는 오수희의 말투는 차갑고도 따스한 복수극 ‘친절한 금자씨’의 온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박찬욱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마음에 드는 영화가 나오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친절한 금자씨’는 연극배우 라미란이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감에 젖었을 때 축복처럼 다가온 영화다. 라미란은 “오늘 저녁 시간 되냐”는 한 스태프의 전화를 받은 후 아기를 업고 달려가 오디션에 참여했다고 한다.

연기를 재개했다고 하나 충무로에서 라미란에게 주어진 자리는 좁디 좁았다. 댓글마님1(음란서생)과 발 동동 아줌마(괴물), 언년네(잘 살아보세), 맞선녀2(그녀는 예뻤다), 정경부인(미인도), 맛사지녀1(거북이 달린다) 등 주로 단역을 연기했다. 2010년 첫 주연을 맡았는데 탈북 여성의 힘겨운 삶을 그린 저예산 독립영화 ‘댄스타운’이었다. 평단의 호평이 따랐으나 대중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

라미란은 JK필름을 만나면서 도약대를 마련했다. ‘댄싱퀸’(2012)을 시작으로 ‘스파이’(2013)와 ‘국제시장’(2014), ‘히말라야’(2015) 등 JK필름이 제작한 흥행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렸다. 인연은 ‘헬로우 고스트’(2010)로 시작됐다. 윤제균 감독이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선 길영민 JK필름 대표에게 라미란을 ‘댄싱퀸’에 출연시키자고 제안했다. 윤 감독은 “재미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있다”며 극찬했다는데 정작 라미란은 ‘헬로우 고스트’에서 아주 짧게 모습을 나타낸다. 주인공 상만(차태현)이 만취해 창문으로 소변을 보는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옆집 아줌마 역할이었다. 그의 대사는 “지금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뭐… 어딜 넘봐?” 정도밖에 없다.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윤 감독의 눈이 정감 넘치게 웃기는 라미란의 재능을 포착한 것이다.

배우 라미란은 '댄싱퀸'에서 '왕십리 빨간 망사' 명애를 연기하며 연기 인생 전환점을 마련한다. CJ ENM 영화사업본부 제공

배우 라미란은 '댄싱퀸'에서 '왕십리 빨간 망사' 명애를 연기하며 연기 인생 전환점을 마련한다. CJ ENM 영화사업본부 제공


라미란은 ‘댄싱퀸’에서 자칭 ‘왕십리 빨간 망사’ 명애를 연기했다. 뒤늦게 가수라는 꿈을 찾아 나선 정화(엄정화)의 친구다. 명애는 휴먼 코미디 ‘댄싱퀸’이 유발하는 웃음의 50% 정도를 담당한다. 정화와 명애가 짝을 이뤄 TV 오디션프로그램에 도전하는데, 예심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인 두 사람에게 심사위원 이효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혹시 가수 아닌 개그맨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라미란의 코믹 연기가 그만큼 차지다. 길영민 대표는 “(댄싱퀸의) 이석훈 감독과 논의해 라미란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여자 배역을 맡겼는데 워낙 반응이 좋아 ‘스파이’에 바로 캐스팅했고 다음 영화들로 출연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라미란의 장점은 밉지 않은 천연덕스러움과 서민적 풍모다. “아무리 외모가 멋있는 배우라고 해도 가질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길 대표)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치타 여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모습은 화면 밖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정직한 후보'는 라미란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한 영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정치인 주상숙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라미란의 개인기를 통해 완성된다. NEW 제공

'정직한 후보'는 라미란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한 영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정치인 주상숙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라미란의 개인기를 통해 완성된다. NEW 제공


라미란은 매니저 없이 홀로 차를 운전해 촬영장에 오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직거래로 물품을 구입한다고 한다. 한 영화프로듀서는 “라미란은 현장에서 ‘19금’ 농담을 거리낌없이 하며 동료 배우, 스태프와 스스럼없이 지낸다”며 “여느 유명 배우들과는 다르게 소탈하고 털털한 성격”이라고 했다. “예능프로그램 ‘언니들의 슬램덩크’ 속 모습을 떠올리면 됩니다. 80% 정도가 실제 모습과 일치해요. 친화력이 지금의 라미란을 만든 거 아닌가 생각해요. 함께 다시 일하고 싶은 배우이니 좋은 시나리오가 몰릴 수밖에요.”

충무로는 나이와 인기가 반비례하는 곳이다. 특히 여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화면 주변부로 밀려난다. 라미란은 달랐다. 단역과 조연을 거쳐 40대에 주연급 배우로 우뚝 섰다. 지난달 열린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선 ‘정직한 후보’(2020)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라미란은 시간을 역주행하는 배우인 셈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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