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는 한국영화의 미래일까

입력
2021.03.02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영화 '승리호'. 넷플릭스 제공

영화 '승리호'. 넷플릭스 제공

“요즘 영화 현장에선 연출부 스태프들이 영화 이야기를 거의 안 해요. 최신 IT 기기나 자동차, 게임 이야기를 하지. 감독이 되고자 하는 열망도 별로 없어 보여요. 전문 조감독으로 사는 게 훨씬 안정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현장 경력이 20년인 영화감독 A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 전 본 영화 ‘승리호’를 떠올렸다. 뛰어난 기술자들이 모여 겉모양만 근사하게 만든 알맹이 없는 영화. 굳이 ‘승리호’뿐만이 아니다. 기술적 완성도는 훌륭한데 내용은 어디선가 몇 번씩이나 본 것 같은 한국영화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궁금하던 터에 약간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승리호’를 끝까지 지켜보는 데는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영화관이 아니어서 집중이 잘 안 되기도 했지만,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지루함과 당혹감을 참을 수 없어 세 차례의 휴식을 거친 뒤에야 관람을 마칠 수 있었다. ‘제작비 240억원으로 이 정도의 시각적 완성도를 뽑아냈다니’ 하고 감탄하는 순간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몇 번은 더 끊어 봤을 것이다.

‘승리호’의 기술적 성취를 부정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제작비의 부담과 기술력의 부족, 내수시장의 한계 등 여러 제약으로 인해 우주 영화 제작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라들에 비하면 ‘국뽕’에 취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근사한 외관만으로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승리호’ 공개가 한 달이나 지난 마당에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건 한국 대작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어떤 불균형의 심화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서사의 퇴보. 익숙한 흥행 영화의 공식을 답습하는 듯 허술하고 뻔한 서사는 언젠가부터 한국 대작영화의 고질병이 됐다. 지난해 개봉한 ‘반도’나 넷플릭스로 직행한 ‘사냥의 시간’, 2019년 흥행작 ‘백두산’ 등이 대표적이다.

‘돼지의 왕’의 연상호 감독,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김씨 표류기’의 이해준 감독, ‘짐승의 끝’의 조성희 감독은 어쩌다 평범한 이야기꾼이 됐을까. 크고 작은 영화의 조감독을 거쳐 영화감독이 된 B는 “신인 감독은 물론이고 웬만큼 이름 있는 감독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자본을 쥔 투자ㆍ배급사의 강한 입김이 몰개성의 한 요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들어선 영화감독 지망생들도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는 야심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오랫동안 단편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온 영화감독 C는 “요즘 출품되는 단편영화들을 보면 독특한 상상력이나 개성을 드러내려는 열망보다 일반 상업영화 못지않은 매끈한 완성도로 대형 배급사의 눈에 들려는 야심이 더 눈에 띈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의 영화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자본과 예술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그랬다. 그러나 일부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은 한국영화가 여전히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며 아쉬워한다. 봉 감독도 요즘의 젊은 감독들이 자신만큼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승리호’는 한국영화의 미래일까. 기술적인 측면에선 마냥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아 반갑지만, 영화 예술의 미래라면 조금 암담하다. 넷플릭스는 올 한 해 한국 콘텐츠에 5,5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중엔 독자적인 영화 제작도 포함된다. 국내 영화 투자ㆍ배급사들이 길을 잃고 헤맬 때 넷플릭스가 그 미래를 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암담해진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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