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이기적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둬선 안 된다

입력
2021.02.25 16: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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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마치 벌이 꿀을 만들 듯 악을 낳는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이성을 잃고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소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포착한 20세기 고전으로 꼽힌다. 하지만 소설 바깥에서 실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한 끝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됐다.

"인간은 마치 벌이 꿀을 만들 듯 악을 낳는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이성을 잃고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소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포착한 20세기 고전으로 꼽힌다. 하지만 소설 바깥에서 실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한 끝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됐다.

'루시퍼 효과'라고도 알려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 내면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주는 대표적 사례로 지금까지 인용되고 있다. 실험을 주관한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1971년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건물 지하에 가짜 감옥을 만들어 놓고, 건강한 백인 남학생 18명에게 교도관과 수감자로 배역을 나눠 주고 역할극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실험 첫날부터 죄수 역의 학생들은 난동을 부렸고, 간수 역의 학생들은 이를 제지한다는 명분으로 가혹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모의 실험이란 걸 알면서도 선량한 학생들은 점점 악마로 변해 갔다.

그런데 2018년 이 실험이 교묘하게 조작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실험을 기록했던 미공개 녹취록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의 이상행동은 약속한 보수를 받기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된 연기였거나 간수 역의 학생들이 만든 규칙과 처벌은 짐바르도 교수의 부추김을 받아 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실험이 얼마나 과장, 왜곡됐는지는 2002년 BBC 방송이 재현한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BBC의 실험에선 교도관과 수감자 사이에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개입도 지시도 없었던 게 차이다. 그들은 함께 대화하고, 음식을 나눠먹고, 실험 마지막 날엔 평화주의 공동체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의 잔인성만 부각시킨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만 기억하고 있다.

1971년 행해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선량한 사람도 괴물이 된다"는 충격적 메시지를 던져줬다. 그러나 50년이 지나 공개된 각종 기록에 따르면 실험을 주관한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연구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골적인 지시에 나선 것으로 밝혀지면서 실험 결과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 실제 BBC 방송이 21세기에 재현한 실험에서 교도관과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가혹행위는커녕 선물을 주고받으며 화목하게 지냈다. 인플루엔셜 제공

1971년 행해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선량한 사람도 괴물이 된다"는 충격적 메시지를 던져줬다. 그러나 50년이 지나 공개된 각종 기록에 따르면 실험을 주관한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연구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골적인 지시에 나선 것으로 밝혀지면서 실험 결과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 실제 BBC 방송이 21세기에 재현한 실험에서 교도관과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가혹행위는커녕 선물을 주고받으며 화목하게 지냈다. 인플루엔셜 제공

성악설은 힘이 세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를 비롯해 지금의 세계를 구축하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시스템의 토대는 ‘악’이다. 사람들은 애초에 선했던 인간을 문명과 사회가 타락시켰다는 루소의 호소 대신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을 외치는 홉스의 구호를 내면에 품었다.

하지만 책은 대담하게도 이 전제를 단숨에 뒤엎는다. 인간은 본디 선하고, 고상하다고 주장하면서다. 그렇다고 책이 인간은 천사 같은 존재라거나, 성선설을 주장하는 설교집은 아니다. 저자는 인간은 사악하다는 프레임을 쌓아 올린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과학 실험의 통념을 문헌의 실증연구와 현장 탐사를 통한 팩트체크로 깨부수며 성악설의 허구를 낱낱이 폭로한다.

가령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그린 ‘파리대왕’을 반박하기 위해 저자는 실제 사례를 발굴했는데, 1965년 폴리네시아 통가의 무인도 아타섬에 15개월간 고립된 6명의 소년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야만인으로 변해 전쟁 놀음에 몰두하긴커녕, 서로 협력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며 버틴 끝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됐다. 탐욕, 전쟁, 식인이 벌어지며 인류의 비극적 미래로 그려졌던 이스터섬 이야기 역시 잘못된 인용이 확대재생산되며 빚어진 역사적 오해라는 점을 밝혀낸다.

휴먼카인드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 유럽 전역을 뒤흔든 혁신적인 대안 언론 '드 코레스폰던트'의 창립 멤버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휴먼카인드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 유럽 전역을 뒤흔든 혁신적인 대안 언론 '드 코레스폰던트'의 창립 멤버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문제 삼는 건, 인간의 본성이 악이 전부인 양 몰아가는 세상의 태도다. 성악설을 퍼트리는 강력한 서사들이 부정적 세계관과 믿음을 키우고, 결국 인간의 부정적 행태를 부추기는 이른바 노시보 효과가 세계를 더 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다. 저자는 폭력과 살인 등 잔학한 범죄가 ‘후천적 교육의 결과물’이란 주장까지 내놓는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악을 부추기는 이들은 누구인가. 저자는 언론과 권력을 배후로 꼽는다. 언론은 무수한 평화로운 순간은 외면하고 예외적인 사건들을 집중 보도하면서 잔인하고 폭력적인 뉴스들만 쏟아내기 바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기에 이른다. 인간이 악할수록 흥하는 건 권력이다. 인간의 악을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통제력을 정당화하려 든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세계. 이를 끊어내기 위해서, 저자는 인간은 선하다는 인식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없던 걸 새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종이 지금까지 결국 살아남은 건 ‘이타성’ 덕분이었다. 타인과 서로 협력하고 공감하는 '사회적 모방'을 통해 같이 똑똑해질 수 있었던 게 결정적 무기였다. 저자는 이제는 그 선함의 원리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폭력과 적대, 불신과 냉소가 빠르게 세상을 지배한 것처럼 우정과 친절, 협력과 연민은 얼마든지 전염될 수 있지 않겠는가.

휴먼 카인드·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조현욱 옮김·인플루엔셜 발행·588쪽·2만2,000원

휴먼 카인드·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조현욱 옮김·인플루엔셜 발행·588쪽·2만2,000원

지나친 낙관주의 아니냐는 '현실주의자'들의 냉소가 나올 수 있다. 이에 저자는 “현실을 모르는 건 그들"이라고 반박한다. "세상에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주의란 단어의 의미는 달리 쓰여야 한다.” 결국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삶을 택할지다. 당신이 책을 읽고 지금보다 더 친절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책은 꽤 성공한 거다. 이기적 인간이 지겹고 진절머리난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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