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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4년 9개월, 속헹씨가 죽어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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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경기 포천시 채소농장. 한겨울이지만 비닐하우스 내부는 상추와 얼갈이, 시금치에서 스며나오는 초록내음으로 싱싱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여러 개를 가로질러 농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사뭇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차광막으로 덮인 비닐하우스 내부엔 채소 대신 플라스틱 패널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굳게 문이 잠겨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 이주노동자 5명이 살던 숙소였다.
캄보디아 출신 31세 여성 누온 속헹(NUON Sokkheng)씨도 그곳에 살았다. 지난해 12월 20일 영하 18도 한파 속에 속헹씨는 비닐하우스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주검은 추위를 피해 다른 곳에 머물다 온 동료들에게 뒤늦게 발견됐다. 사인은 간경화로 인한 합병증이지만, 죽음의 이면엔 이주노동자의 주거권과 건강권 문제가 숨어 있다. 우리 밥상을 책임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하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속헹씨 죽음을 통해 다시 짚어봤다.
2016년 3월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받고 입국한 속헹씨의 첫 근무지는 경기 남양주 농장이었다. E-9은 전문기술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시험 등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용하는 비자다. 근로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 시급은 그해 최저임금인 6,030원이었다. 근로계약서엔 휴게시간이 표시돼 있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63조에는 농어촌 노동자에겐 근로시간 및 휴식·휴일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돼있다. 법대로라면 농어촌 노동자는 고용주가 한 달 내내 휴일을 안 줘도 또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시켜도 항의할 수가 없다. 실제로 농촌에선 계약내용과 무관하게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비일비재하다. 속헹씨 역시 중노동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일하고 받은 그의 첫 월급은 122만6,502원. 농장주는 여기에서 숙박시설 제공료로 17만원을 떼어갔다.
속헹씨는 2018년 8월 남양주 농장을 나왔다. 사유는 경영상 필요에 의한 해고 즉 권고사직이었다.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관계자는 "농장 일감이 떨어진 농장주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겠다고 신고했고, 노동자도 권고사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속헹씨는 그해 12월 경기 포천시 농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포천에선 근로시간이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로 1시간 늘었다. 근로계약서에 휴게시간(월 4회·하루 1시간)도 명시됐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시급(7,530원)도 올랐다. 숙박비도 월 17만원에서 12만원으로 줄었지만, 남양주 농장에서 안 받던 월 9만원의 중식비가 차감됐다.
포천 농장의 숙소는 한눈에 봐도 열악했다. 지난달 12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숙소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숙소 내부가 곰팡이와 결로로 뒤덮여있고 화장실 바닥은 마감처리도 안 돼있었다. 월급에서 숙박비를 빼고 제공한 기숙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농장주가 "이주노동자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보살폈다"고 전하자, 류 의원은 "가족이라면 이런 데 살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속헹씨가 머물렀던 숙소는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보기에도 열악했던 것 같다. 포천의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여성 아임꾼티아(30)씨는 2019년 고용부 알선센터 소개로 속헹씨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기숙사가 너무 지저분하고 더러워 일을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헹씨는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E-9 비자를 받으면 3년 체류 뒤 1년 10개월 연장이 가능하지만 고용주 동의가 필수다. 속헹씨는 포천 농장에서 계약 연장에 성공해 올해 1월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시급은 8,350원으로 상승했지만 월 12만원이던 숙박비가 13만9,000원으로 따라 올라, 결국 손에 쥐는 돈은 똑같았다.
이주노동자는 입국 전에 건강 검진을 받는다. 건강에 문제가 없어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부를 통해 받은 '건강검진 결과통보서'에도 속헹씨 건강은 '정상'으로 나와 있다. 다만 '간질환주의-생활습관 개선 및 주기적 검사 필요'라는 의사 소견이 담겼다. 전문의들에 따르면 이 정도는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실제 속헹씨는 한국 농장에서 별 탈 없이 일했다.
그러나 속헹씨 건강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달리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당국이 숨진 속헹씨 동료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1년 전 속헹이 토할 때 피 나오는 걸 본 적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제대로 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2019년 7월 정부가 모든 외국인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속헹씨도 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했다. 그가 낸 건강보험료는 월 11만~13만원으로 비슷한 임금을 받는 한국 노동자의 2~3배에 달했다. 정부가 건강보험 전체 가입자의 평균보험료를 이주노동자에게 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속헹씨는 1년 반 동안 200만원이 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도 건강 검진은 커녕 병원 문턱 한 번 밟지 못했다.
이주노동자 기숙사산재사망 대책위원회는 속헹씨 사망 당일 숙소 내 난방장치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냉골 같던 숙소가 그의 병세를 갑자기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에 따르면 속헹씨 동료는 사망 이틀 후인 작년 12월 22일 시민단체와의 통화에서 "사건 전날부터 전기 차단기 스위치가 계속 내려가 속헹씨와 룸메이트가 추워서 잠도 못 자고 숙소 밖 스위치를 올리는 일을 반복했다. 농장주에게 말했지만 조치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농지용 전기를 숙박시설로 끌어오는 과정에서 전력사용 과다로 숙소 차단기가 작동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대책위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작년 12월 30일 속헹씨 농장주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용부에 고발했지만, 고발장 접수 한 달이 넘도록 동료 노동자와 추가 면담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책위는 "정부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용부는 "동료 노동자 모두 현재 일을 하고 있어 만나기가 쉽지 않다. 조만간 면담 날짜를 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속헹씨는 사망 8일 뒤인 지난해 12월 28일 경기 성남시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본국에 있는 속헹씨 유족으로부터 장례 절차를 위임받은 주한캄보디아 대사관이 화장을 서둘렀다는 후문이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는 "캄보디아 정부는 자국 노동자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기보다 덮기에 급급한 모습"이라며 씁쓸해했다.
화장 당일 속헹씨 동료 두 명은 유골함을 경기 군포시 캄보디아 불교센터로 옮겼다. 유골함은 이곳에서 이틀간 안치됐다가 배편을 통해 캄보디아로 옮겨졌다. 캄보디아 불교센터의 린사로 스님은 "속헹은 고향에서 나이 드신 부모와 남동생 등 많은 가족을 부양했다. 이국에서 이렇게 세상을 등지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속헹씨 사망 직후 포천 비닐하우스 숙소 서랍장 안에선 1월 10일자 프놈펜(캄보디아 수도) 항공권이 발견됐다. 4년 10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친 그는 예약했던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 땅에 묻혔다. 한국에선 오는 7일 서울 종로구 법련사에서 속헹씨 49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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