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정인이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입력
2021.02.02 04:30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서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정인 양의 묘지가 눈으로 덮여 있다. 연합뉴스


고백하자면, 생후 16개월의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사건에 대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분노하고 있을 때, 나는 가능한 그 일에 대해 모르고 싶었다.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다룬 시사고발 프로그램도 보지 않았고, SNS를 뒤덮은 ‘#정인아미안해’라는 해시태그도 일부러 피해 다녔다. 정인이가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한데, 얼마나 고통스럽게 숨이 끊어져갔는지, 그 고통의 주모자가 정확히 누군지 안다 한들 의미 없어 보였다.

구하지 못한 너무 많은 목숨들을 떠올리다 지친 나머지, 나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된 어른이었다. 자음과모음 2020 겨울호에 실린 안보윤의 단편소설 ‘밤은 내가 가질게’의 주인공 나무 역시 이런 냉소의 덫에 빠진 어른이다.

어린이집의 주임 보육교사인 나무는 네 살 주승이의 어깻죽지와 몸 이곳 저곳에서 새끼손가락만한 크기의 파랗고 반들반들한 멍을 발견한다. 그러나 주승이의 양육자는 “선생님이 우리 주승이 때렸어요?”라며 도리어 어린이집의 책임을 묻는다. 자칫 아동 학대의 덤터기라도 쓰게 될까 봐, 나무는 그날부터 매일 주승이가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승이의 옷을 벗겨 학대의 흔적을 찾는다. 심지어 주승이의 멍을 보면서 “좀 더 크고 뚜렷했다면 좋았을 텐데. 단면이 거칠거칠하거나 이쪽으로 조금만 더 길게 이어졌다면”하고 생각할 정도다.

그렇게 포착한 아동학대의 정황을 바탕으로 양육자의 접근금지를 신청한 뒤, 나무는 주승이를 잊으려 한다. 그런 나무를 보며 “방치요. 선생님, 그것도 학대예요”라고 말하는 보조교사에게도 “어린이집 선생은 보육 서비스직”이라며 “서비스를 요구하면 서비스만 해줘야지”라고 대꾸한다. 나무는 “죄책감은 책임질 위치에 놓인 사람에게나 허락된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주승이를 자신의 책임 바깥으로 밀어낸다.

안보윤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이천희


그렇게 시종일관 책임 유무를 재고 따지던 나무지만, 주승이의 배에서 또 다시 크고 뚜렷한 멍 자국을 발견하고는 결국 평정을 잃는다. 아이의 배꼽은 원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룩덜룩한 멍 자국이 뒤덮고 있었다. 집요하게 그곳을 내리쳤을 어떤 손을 생각하며, 나무는 끝내 주승이를 자신의 책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나무의 냉소는 책임이 얼만큼 무거운 단어인지 아는 데서 비롯한다. 단지 분노하고 연민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음을 알기에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연민과 분노가 아이들을 구한다.

정인이 사건이 가시화 된 후 경찰은 전국의 학대 사건을 총괄하는 학대정책계를 신설하기로 했다. 아동과 접촉이 잦은 전국의 약국이나 편의점 등과 연계해 시민들의 아동학대 감시 기능도 강화한다. 정인이는 못 구했지만 적어도 제2의 정인이 만큼은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인이는 그렇게 수많은 아이들을 구했는데, 하물며 어른인 내가 냉소와 외면을 내 몫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지치지 않고, 있는 힘껏 울며 화내기로 한다. 그게 내가 정인이에게 다해야 할 책임이다.

한소범 기자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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