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해변에서 엿본, 어른 세계의 진실

입력
2021.01.26 04:30
수정
2021.01.26 14:52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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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해변의 피크닉'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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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상실은, 여섯 살 무렵 겪은 막내 외삼촌의 죽음이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바싹 마른 손이나, 병상을 둘러싸고 흐느끼던 어른들의 뒷모습 같은 것들은 그 시절 기억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나를 귀여워해 줄 어른 한 명이 영영 사라졌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기분을 ‘애상(哀傷)’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겠지만, 여섯 살 아이에게도 분명 애상의 순간은 있었다.

아이의 성장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여러 깨달음과 감정에 이름 붙여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아이 내면에서 스스로 이뤄진다.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에 실린 단편 손보미의 ‘해변의 피크닉’은 그 놀라운 성장의 순간을 포착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나’는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부산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서 한 달 가량을 머무른다. 부모님의 결혼을 반대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주인공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되고, 그 후로 유일한 손녀딸을 매년 여름 자신들의 대저택으로 불러들인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방문한 할머니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삼촌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보다 열댓 살 어린 남동생이자 집안의 ‘난봉꾼’ 취급을 받는 삼촌은 어쩐지 나를 긴장시킨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우리 돼지”라고 부르며 나를 어린 아이로만 바라볼 때, 삼촌은 “너희 엄마가 여름마다 너를 여기에 보내는 대가”와 “난 네 아빠의 반쪽 짜리 동생”이라는, 지금껏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어른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는 존재다.

손보미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손보미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진실을 귀띔해준 데 대한 화답으로, 나는 삼촌을 할머니와 함께 가는 해변의 피크닉에 초대한다. 그리고 삼촌은 그 해변에 ‘믿을 수 없이 마르고 예쁜 여자’를 대동해 나타난다.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고 사방에서 바람과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름의 바다에서, 나는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낯선 여자 사이에 떠도는 마술 같은 긴장을 감지한다. 그리고 문득,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현실, 진실된 세계의 모습”을 깨닫는다.

“안과 밖이 모두 지저분한 세계.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건 얼마간의 마술이었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 진짜 증오와 가짜 증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럽고 선명한 깨달음이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깨달음이(…) 분명히 그날의 내게 도달했다는 점이다. 단어들의 경로는 질서정연하고 계획적이었지만, 그런 깨달음은 아무런 인과적 관계도, 어떠한 조짐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그러므로 거부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내게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 여름 해변에서 엿본 어른들의 진실, 상실의 경험은 주인공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성장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하고 미심쩍고 불미스러운 그 느낌”에 하나 둘씩 이름 붙여가며, 우리는 모두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니 ‘어린이라는 세계’는 결코 유치하지 않다. 다만 자신만의 언어를 찾고 있을 뿐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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