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짓밟힌 시절, 우리와 닮은 이야기

입력
2021.01.23 04:40
17면

<21> 넷플릭스 '반교:디텐션'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광폭한 권력에 위협당하는 공포를 그려낸 '반교:디텐션'은 섬뜩하면서도 과거의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든다. 넷플릭스 제공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광폭한 권력에 위협당하는 공포를 그려낸 '반교:디텐션'은 섬뜩하면서도 과거의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든다. 넷플릭스 제공


2019년 개봉한 중국어권 영화 중에서 작품성과 흥행 모두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는 '소년 시절의 너'와 '반교:디텐션'이 손꼽힌다. 지독한 학교 폭력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소년시절의 너'는 2019년 9월 중국에서 개봉해 2,600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홍콩금상장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했다. 주동우는 금계장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반교:디텐션'은 9월 대만에서 개봉해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약 104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금마장에서 신인감독상과 미술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했다. '반교:디텐션'의 원작은 2017년 레드 캔들 게임즈에서 제작한 호러 게임이다. 발매 당시 대만 스팀 1위, 세계 판매량 3위를 기록했고 유저 리뷰의 97%가 긍정적인 평이었다. 이후 많은 게임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게임의 성공에 이어 영화로 각색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다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게임과 영화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고, 드라마는 영화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반교:디텐션'은 왓챠와 웨이브 등에서 볼 수 있다.

성공한 게임과 영화에 이어 제작된 넷플릭스의 드라마 '반교:디텐션'은 원작에서 30년 후인 1999년이 배경이다. 넷플릭스 제공

성공한 게임과 영화에 이어 제작된 넷플릭스의 드라마 '반교:디텐션'은 원작에서 30년 후인 1999년이 배경이다. 넷플릭스 제공


'반교:디텐션'은 중국에서 상영금지가 되었다. 육체가 없는 귀신이 나온다는 점도 이유겠지만 대만 계엄령 시기의 폭력을 고발하는 내용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국민당 치하의 대만은 1949년 계엄령을 선포했고, 장개석이 공산당에 패배하고 넘어온 후 1987년까지 이어졌다. 게임과 영화 '반교:디텐션'의 배경은 1969년이다. 진롼시 추이화 고등학교의 독서회가 발각되어 장밍후이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이 사형당한다. '월든' '타고르 시집' 등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발돼, 군에 끌려가 고문 당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영화는 늦은 밤 깨어난 여고생 팡루이신이 괴물들로 가득한 학교에서 도망치는 상황을 보여준다. 괴물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시민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던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광폭한 권력에 위협당하는 공포를 그려낸 '반교:디텐션'은 섬뜩하면서도 과거의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든다. 군부독재와 유신을 겪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공포다.

성공한 게임과 영화에 이어 제작된 넷플릭스의 '반교:디텐션'은 원작에서 30년 후인 1999년이 배경이다. 계엄령이 1987년에 끝났으니 12년이 흐른 뒤다. 대만은 1989년 리덩후이가 총통이 된 후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폭력과 공포는 1999년에도 여전했다. 여전히 국민당의 일당 집권이었고, 정권교체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2000년 천슈이벤의 당선이었다. 드라마 '반교:디텐션'은 독재정권의 폭력과 공포가 사회 곳곳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교:디텐션'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드라마다. 넷플릭스 제공

'반교:디텐션'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드라마다. 넷플릭스 제공


한국에서 '여고괴담'이 개봉한 것은 1998년이었다. 성적제일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는 학생들의 원망과 슬픔이 '여고괴담'을 탁월한 공포영화로 만들었다. 1년 뒤가 배경인 '반교:디텐션'의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추이화 고등학교로 전학을 온 류윈샹은 등교 첫날, 학생들의 품성과 태도를 책임지는 바이교관에게 가방 검사를 당한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뺏기고, 수업에 관계없는 책은 읽지 말라고 꾸중을 듣는다. 성적이 나쁘거나 규율을 지키지 않는 학생은 ‘귀신’이라고 붙은 팻말을 목에 걸고 화장실 청소 등 궂은 일을 해야 한다. 교장은 과거의 학풍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곳이라고 추이화를 소개한다. 세기말의 한국과 대만의 학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폭력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1969년 팡루이신이 자살했고, 이후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된 건물이 있다. 류윈샹은 폐쇄된 건물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갔다가 마을 묘당의 아들인 청원량을 만나고, 3학년 선배가 투신자살하는 모습을 함께 목격한다. 금지된 건물에 들어갔다는 것이 밝혀져서 바이교관에게 찍힌 류윈샹은 청원량과 함께 ‘귀신’이 된다. 집에서도 평화롭지 않다. 류윈샹은 문학상에 응모한 작품에서 표절을 했다가 밝혀지면서, 전학까지 하게 되었다. 타이페이에 남은 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집착한다. 모든 것이 불안한 류윈샹에게 팡루이신의 귀신이 나타나 다정하게 말한다. “나와 거래할래?”

드라마 '반교:디텐션'은 독재정권의 폭력과 공포가 사회 곳곳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반교:디텐션'은 독재정권의 폭력과 공포가 사회 곳곳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팡루이신에게 죽은 담임 대신 새로운 선생이 온다. 교장의 아들인 선화는 의욕적이고 개방적이다. 귀신 팻말을 없애고, 바이 교관과 대립하며 학교 개혁안을 내세운다. 하지만 교장은 아들과 함께 시의원, 국회의원과 친분을 맺으며 학교를 기업화할 생각이었다. 실패한 시인인 선화는 학생들과 함께 시 쓰는 모임을 주도한다. 방황하던 류윈샹도 선화의 말에 설득되어 모임에 합류한다. 그리고 문학상에 당선된다. 하지만 류윈샹은 그 시가 자신이 쓴 것인지, 팡루이신이 대신 쓴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일까, 지금 이 행동은 과연 내가 한 것일까.

'반교:디텐션'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드라마다. 영화도 기본적인 질문은 같다. 자신이 잘못한 일, 기억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회피한다면 끊임없이 같은 곳을 맴도는 귀신이 될 뿐이다. 처음에는 다정하고 심지 있는 지식인처럼 등장하는 선화도 마찬가지다. 전혀 팔리지 않는, 인정받지도 못하는 시를 쓰다가 아버지의 학교에서 선생을 하게 된 선화는 나약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다. 선화의 좌절된 욕망은 류윈샹에게 투사된다. 자신이 가르치는, 이끌어준 윈샹이 대단한 시를 쓰면 자신이 인정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윈샹을 압박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선화의 행동은 윈샹을 착취하는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게임과 영화에 이어 드라마까지 '반교:디텐션'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하나의 구조로 완성된다. 넷플릭스 제공

게임과 영화에 이어 드라마까지 '반교:디텐션'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하나의 구조로 완성된다. 넷플릭스 제공


6화가 되면, 류윈샹과 팡루이신의 시간이 바뀌어버린다. 류윈샹이 69년 팡루이신의 몸으로 들어가고, 팡루이신이 99년 류윈상의 몸을 차지한다. 독서회가 발각되기 전, 팡루이신이 독서회를 지도하는 장밍후이 선생과 가까워지고 시를 쓰게 되는 시점이다. 류윈샹이 과거에 가서 할 일은 하나다.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팡루이신이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모든 것을 타인의 잘못으로 돌려 복수하려는 마음을 접게 만드는 것. 즉 류윈샹이 경험하는 69년은 실재했던 과거가 아니라 팡루이신의 기억에 존재하는 과거다. 팡루이신의 머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지옥인 것이다. 즉 류윈샹은 '반교:디텐션' 게임을 거듭하는 것이다. 잘못된 결과가 나오면 되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게임은 끝난다. 그렇게 게임과 영화에서 드라마까지 '반교:디텐션'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하나의 구조로 완성된다.

1969년의 장밍후이와 독서회가 원한 것은 ‘자유의 비’였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명목상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류윈샹도 선화도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69년의 팡루이신과 99년의 류윈샹이 속한 반의 이름은 모두 ‘충(忠)’이다. 집단을 위해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강요되는 사회는 개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종교이건, 인종이건, 민족이건 절대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사회에 결코 ‘자유의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인간을 억압하는 집단 그리고 사회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강하고 폭력적이다. 독재정권이 끝났어도 개인을 억압하는 제도와 윤리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김봉석 문화평론가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