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결정으로 또 꼬였다... 한일관계, 훈풍에서 삭풍으로

입력
2021.01.09 04:3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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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4일 청와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전화 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4일 청와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전화 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연이은 사법부발(發) 한일 관계 악재에 정부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8일 서울중앙지법은 일본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 위안부 피해자 12명의 손을 들어 줬다. 역사적으론 정의의 판결이지만, 외교적으론 정부에 난제를 안겼다.

최근 한일 관계가 냉랭해진 결정적 계기는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파기 신경전,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을 거치며 벼랑끝까지 갔다가 스가 요시히데 총리 시대를 맞아 조금씩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2년여 만에 또 다시 사법부가 한일 관계에 '대형 변수'를 던진 것이다. 스가 총리는 "위안부 판결을 결코 수용 할 수 없다"고 즉각 반발했다.

청와대는 이날 입장을 내지 않았고, 외교부는 판결 6시간 30분 만에 "정부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 이번 판결이 외교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 양국간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계속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는 대변인 명의 논평을 냈다.

법원이 8일 판결문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에서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권은 적용되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외교부가 "2015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가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문구를 논평에 넣은 것은 정부 고민의 깊이를 보여 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 판결이 내려진 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뉴시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 판결이 내려진 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뉴시스


"순식간에 사라진 훈풍...강제동원 판결보다 악재"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의 피고는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기업이어서 양국 정부가 해법을 찾는 노력을 할 공간이 있었다. 이번 위안부 소송 상대는 일본 정부다. 일본은 '국가는 다른 나라의 재판에서 피고가 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국가(주권) 면제’ 원칙을 내세워 소송에 일절 응하지 않았으나, 재판부는 보편 인권이 주권 면제 원칙 위에 있다고 봤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8일 “오늘 판결은 강제동원 판결 이상으로 일본이 반발하고 한일 관계에 더 큰 파장을 낳을 것”이라며 “사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낀 외교부가 입장을 정하기도 어렵고 할 수 없는 조치도 없다는 게 큰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스가 내각 출범 후 한국 정부는 반일 기조를 철회하고 한일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특히 일본 스가 총리님 반갑습니다”라며 공개적으로 인사한 것, 이후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연달아 일본을 방문한 것 모두 화해 제스처였다.

한국 사법부가 '정부'를 건드린 이상, 일본은 강제동원 판결 때보다 더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금융 제재 등 고강도 경제 보복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가 일본 정부 안팎에서 오르내리는 터였다. 항소를 포기한 일본이 당장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양국의 신뢰엔 또 다시 치명적 상처가 났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해 11월 10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면담한 후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해 11월 10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면담한 후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사법부가 거듭 흔드는 외교...이러지도 저러지도"

정부의 외교 영역을 사법부가 결과적으로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외교의 영역이 분명히 있는데, 국제법상 주권 면제를 인정하지도 않고 (과거사 문제를) 사법 영역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미국 일부 의원들이 반대하는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과 관련해 미국 사법부가 위법 판결을 내리면 우리가 따라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3권 분립 원칙, 사법 농단 트라우마 등 때문에 한국 정부는 사법부 결정에 '조금도' 개입할 수 없지만, 일본은 한국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 사법부 변수가 불거질 수록 양국 관계가 더 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번 판결 결과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성사된 한일 양국간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방치했다. 이원덕 교수는 “현 정부는 당시 위안부 합의가 잘못된 합의라고 제3자 입장에서 평가만 했지, 후속 조치를 위한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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