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선 얌전하던 애도 온라인선 욕설… 채팅방은 출구 없는 감옥

입력
2021.02.01 06:30
수정
2021.02.06 12:52
5면

또래 사이 규칙에 취약한 청소년들
채팅방 이용한 괴롭힘에 쉽게 동조
방관자 줄고 가해자 다수로 늘며
피해자 고통 오프라인보다 커져
"개념 명확히 정의하고 인식교육을"

코로나19에 따른 등교일수 감소로 전체적인 학교폭력 피해 경험은 줄었지만, 사이버 폭력과 집단 따돌림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은 증가했다. 피해 학생들은 또 다른 교실 공간인 온라인 단체 채팅방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피해가 알려지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19에 따른 등교일수 감소로 전체적인 학교폭력 피해 경험은 줄었지만, 사이버 폭력과 집단 따돌림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은 증가했다. 피해 학생들은 또 다른 교실 공간인 온라인 단체 채팅방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피해가 알려지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그거 아세요? 빛 한 줌 보이지 않고 몸 한 뼘 가눌 수 없는 공간에 갇힌 기분을…”

사이버 불링 피해학생

지난해 10월 서울 소재 중3학생 A(15)양은 '에스크'라는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집단 테러를 당했다. 에스크 앱은 페이스북 계정과 연동된 익명 질문 게시판으로 상대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익명성이 보장되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은 질문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돼있다. A양은 에스크 앱에서 ‘다른 애들 뒷담화하고 다니는 X’ ‘같은 반 친구 남자친구 빼앗고 다니는 X’ 등 자신을 겨냥한 댓글을 발견했다. 댓글 내용이 알려지면서 A양 학교 학생들에게 해당 게시물은 꼭 방문해야 하는 곳이 돼버렸다.

A양은 댓글 내용을 통해 B(15)양이 글을 올렸을 것으로 보고, 경찰에 B양의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서버가 해외에 있어 추적이 어렵다며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라며 A양을 돌려보냈다. 학폭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해학생을 특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좌절한 A양은 더 이상 외부에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고립된 A양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또래들의 욕설에 시달렸다.

청소년 사이버 폭력이 날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최근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피해학생이 급증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이버 불링이란 온라인에서 특정인을 대상으로 집단적·지속적·반복적으로 모욕·따돌림·협박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사이버 불링의 개념조차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일부 청소년은 극단적 선택까지 하고 있다.

방과 후에도 이어진 가해 행위

한국일보가 청소년폭력 예방 전문기관(NGO)인 푸른나무재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사이버 폭력피해로 상담이 접수된 건수는 550건으로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반면 신체폭력 상담 접수는 300건 감소했다. 최근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초?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2020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사이버 폭력은 전년보다 3.4%포인트나 증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등교일수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사이버 폭력만큼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래 집단이 성폭행 피해자였던 장혜린(가명·16)양에게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한 발언들. 장양은 이들의 괴롭힘이 이어지자 성폭행 가해자의 선고를 열흘 앞둔 지난해 9월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래 집단이 성폭행 피해자였던 장혜린(가명·16)양에게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한 발언들. 장양은 이들의 괴롭힘이 이어지자 성폭행 가해자의 선고를 열흘 앞둔 지난해 9월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폭행 피해와 이어진 2차 가해에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9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혜린(가명·16)양 역시 코로나19로 등교한 날이 많지 않았다. 장양이 다녔던 학교 측은 “원격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한 탓에 장양이 학교에 나온 날은 보름이 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19년 11월 두 살 많은 남학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장양은 지난해 고교에 진학한 뒤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강간 피해사실이 언급되는 등 또래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2차 피해를 입었다.

장양에게 가해진 폭력처럼 청소년 사이버 불링은 익명성 보장이 안돼 심각성이 더하다.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카카오톡, 페이스북 메시지, 라인 등 ‘인스턴트 메시지’를 통해 피해자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해 학생은 단체 채팅방에서 또 다른 교실을 창조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피해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가해자에 동조 쉬워 피해자 고통 커

서명률(가명·15)양은 수업시간 중 교사에게 궁금한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질문했다는 이유로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사이버 폭력을 당했다. 학교가 끝나면 서양의 휴대폰은 끊임 없이 진동이 울렸다. 교실에서 괴롭혔던 두세명 학생 뿐만 아니라 평소 얌전했던 친구들까지 가세해 채팅방에서 욕설을 쏟아냈다. 학기 내내 사이버 불링에 시달린 서양은 극단적 선택 충동에 휩싸인 나머지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 심홍진 정보통신정책연구위원은 “교실에선 핵심 가해자를 제외한 학생들은 피해자를 괴롭히는데 적극 나서지 않지만, 채팅방 같은 공간에선 '또래 압력(Peer pressure)'에 취약해 대다수 학생들이 가해자 행동에 동조하기 쉽다"고 말했다. 한 명의 피해자와 다수의 가해자만이 남게 돼 피해 학생이 느끼는 고통은 교실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이버 불링 수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지만, 교육기관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C(14)군은 같은 반 친구 8명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자신의 얼굴이 합성된 상태로 성적 행위를 하도록 보이게끔 하는 ‘지인능욕’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담임 교사는 C군의 피해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기존의 사이버 폭력 유형으로 분류됐던 △떼카(피해학생을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욕설을 퍼붓는 행위) △방폭(피해학생만 남겨두고 단체 채팅방에 나가버리는 행위) △카톡유령(단체 채팅방에서 모두가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 등과는 다른 유형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선영 푸른나무재단 상담팀장은 “과거 '카톡감옥(피해학생을 채팅방으로 계속 초대해 괴롭힌 행위)'이 사이버 불링의 상징이 되면서 초대 거부 기능이 생겼지만, ‘와이파이셔틀(스마트폰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강제 가입하게 해 와이파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지인능욕’ 등 다른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며 "그럼에도 교육기관은 한참이 지나서야 새로운 유형의 괴롭힘을 사이버 불링으로 판단한다”고 지적했다.

인식 부족해 개념부터 명확히 해야

사이버 불링 피해자들은 죽고 싶다고 호소할 정도로 괴로움을 토로하지만, 이들을 보호해줄 제도적 울타리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교육부·여성가족부·경찰청이 운영하는 117, 청소년 사이버상담센터인 1388, 피해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위센터·위클래스 등이 있지만, 어른들의 이해도가 떨어져 피해 학생들이 신고 및 상담을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성추행 피해 뒤 또래 채팅방에서 2차 피해를 겪은 D(17)양은 피해사실을 담임 교사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평소 교사와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은 탓에 보습학원 강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다. 김봉섭 NIA 연구위원은 “학교에선 사이버 불링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쯤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일부 학생들은 상처를 간직한 채 또래들로부터 점점 고립된다. 이선영 팀장은 “부모들은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면 피해가 아물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이버 공간 단절은 청소년들에게 사회적 죽음과 같기 때문에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이버 불링의 개념부터 명확히 규정돼야 제대로 된 예방책이 마련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청소년 사이버폭력 대응 프로그램’을 집필한 조정문 전 NIA 수석연구원은 “개념 정의와 지속적인 인식교육을 통해 사이버 불링이 심각한 폭력임을 학생들에게 깨닫게 하고,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들 눈높이에서 문제를 봐야 해결책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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