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세대의 어제와 오늘

입력
2021.01.0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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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긴급조치 1호

필화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시인 김지하가 75년 2월 석방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필화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시인 김지하가 75년 2월 석방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4년 1월 8일 박정희 권위주의 독재정부가 긴급조치 1호를 발호(發號)했다. 7개항 주요 내용은,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거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일체 행위, 유언비어 유포 날조 행위, 또 그런 사항들을 여러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에 가담한 자를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고,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거였다. 그 헌법이 1972년 10월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제4공화국 헌법, 즉 유신헌법이었다.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물론 이전에도 1967년의 동백림사건, 1968년 통혁당 사건, 1970년 김지하 필화사건 등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의 횡포는 거침없었지만 긴급조치는 감시-통제-억압의 그물을 더 촘촘히 전면적으로 펼치겠다는 선언이었다.

긴급조치 이후 노동운동 학생운동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평범한 시민의 술자리 푸념, 버스 안 농담, 낙서 한 줄이 빌미가 돼 영장 없이 끌려가고 폭행 고문 당하고 억지 자백으로 '빨갱이'가 돼 실형을 살고 그 이력이 블랙리스트로 남아 취업도 못하는, 한 가정이 몰락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긴급조치는 1975년 5월의 제 9호까지 이어지며 그물망을 더욱 정교히 하다가 1979년 10·26 이후 사라졌다. 대신 1980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비상조치란 이름으로 국회 사후 의결이란 조건을 붙여 부활했고, 1987년 개정 헌법으로 대통령 '긴급명령권'이라는 합당한 조건과 절차 및 효력을 규정한 조항으로 개선됐다.

그 엄혹한 시절의 빛나던 투사들이, 또 그들과 친분이 돈독했던 다수가 그 이력을 밑천 삼아 오늘의 권력집단이 됐다. 그중 다수는 비루해졌고, 일부는 미심쩍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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