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않을 자유

입력
2020.12.23 18:00
26면

코로나 방역ㆍ억지입법 개인 자유 위축
강요된 착한 정책, 성과 없고 피로감만?
'無爲之治' '착하지 않을 자유' 되새겨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대북전단을 금지하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대북전단을 금지하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기자가 주미 특파원이던 2015년 7월 4일, 워싱턴D.C. 지하철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20대 청년이 열차에서 30대 남성을 칼로 여러 번 찔러 살해했다. 범인은 이내 붙잡혔는데, 당시 상황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 성인 남성치고는 비교적 작은 165㎝, 57㎏이라는 체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왜소한 범인이 칼을 휘두를 때 객차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을 포함해 승객 10여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한 승객은 호신용 총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NS에서 난리가 났다. ‘미국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 같으면 당장 범인을 때려 눕혔을 텐데’라는 조롱의 글이 잇따랐다.

그런데 SNS의 비난 열기와 달리, 미국 경찰과 주류 언론의 대응은 달랐다. 사건을 수사한 워싱턴 경찰은 “흉기를 가진 범인을 막으려고 위험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승객들을 옹호했다. 지역 언론인 워싱턴포스트(WP)도 마찬가지였다. ‘승객들이 살인범을 제지하는 게 옳았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일반 시민이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소개했다.

미국 언론은 ‘영웅 제조기’다. 조그만 선행도 영웅담으로 포장하기 일쑤다. 그런 미국 언론이 살인을 방관한 시민들을 옹호하는 걸 보며, 미국 사회 저변에 깔린 ‘개인 자유’에 대한 불가침성을 확인했다. 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을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걸 실감했다. 총기 소유, 공공의료 보험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요 논거로 ‘내 맘대로 할 자유’를 내세우고, 그게 또 먹히는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5년도 지난 사건을 새삼 언급한 건 우리 사회에서 불가침으로 여겨지던 수준까지 개인 자유가 침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올 들어 개인의 자유는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모두 축소됐다. 연초에는 코로나19 방역이라는 명분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여당이 의회의 절대 다수당이 된 뒤에는 표현의 자유, 참정권, 재산권 등 헌법상의 권리와 상충된 입법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1가구 1주택을 강제하는 주거복지법, 대북전단금지법, 윤석열 대선출마 금지법 등은 거대 여당이 자신들의 정의와 착함을 입법으로 강제한 사례다.

당장 주거복지법에 대해 ‘은행계좌도 1개, 신용카드도 1개, 동네 자장면집도 1개. 두 개 이상이 뭐가 필요하냐’ ‘1인당 가질 수 있는 재산도 정해놓으라는 거냐’는 등 험악한 댓글이 달렸다. 대북전단금지법에는 미 국무부까지 반대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침해받는 자유에 대해 나만 우려하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느끼게 됐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해괴한 입법 시도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착한 임대인 우대법’의 뒤를 이어 ‘선행자에 대한 조세감면특별법’ ‘착한 학생 대입 특례제’ 등이 시도될지도 모르겠다.

착한 행동은 사회를 맑게 하는 소금이다. 당연히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발성이 전제돼야 한다. 특정 세력이 원하는 선행을 강요하는 입법은 역선택의 ‘루프 홀’을 만들 수 있다. 출범 이후 줄곧 지금 정권이 ‘착한’ 브랜드를 내걸고 끊임없이 일을 벌였지만, 성과는 없고 국민들의 피로감만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쯤 되면 정부와 여당은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논어 구절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아마추어 백신 리더십으로 침체된 국정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면, ‘착하지 않을 자유’의 인정이 출발점일 듯하다.

조철환 에디터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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