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장례식장에서 만나거든 그땐 사귀자”

입력
2020.12.15 04:30
윤성희 '네모난 기억'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KBS다큐인사이트 '너의 장례식을 응원해'. KBS 제공


하얀 가운을 갖춰 입고 시신을 염습한다. 경건하게 고인에게 마지막 예를 다하다가도, 화려한 치어리딩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면 금세 반짝이는 치어리더가 된다. 최근 방송된 KBS 다큐인사이트 ‘너의 장례식을 응원해’는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학생이자 치어리딩 동아리 치알로 단원인 청춘의 일상을 보여준다.

성적에 맞춰, 취업 때문에,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은 이후에. 이 청춘들이 누군가의 마지막 가는 길 채비를 돕고 배웅하는 것을 직업으로 택한 이유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들에게 장례식장은 매일의 일터이자 저마다의 책임을 다하는 곳이다. 청춘은 이렇게 말한다. "치어리딩과 장례지도사, 하는 일은 똑같죠. 응원하는 거잖아요."

장례식장이 오로지 비통으로만 가득 찬 공간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가장 생생한 삶의 복판일 수도 있다는 것은 윤성희의 단편 ‘네모난 기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악스트 2020 9/10월호에 실린 이 소설은, 어긋난 인연의 궤도가 장례식장을 거쳐 비로소 맞춰진 한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정민과 민정은 대학교 만화동아리 네모네모에서 처음 만났다. 정민은 민정을 인문대 매점 앞에서 본 뒤 짝사랑에 빠졌고, 만화에 관심도 없으면서 민정이 부회장으로 있는 네모네모에 가입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떡볶이를 먹던 분식집을 승용차가 덮치게 된다. 이로 인해 크게 다친 정민이 군 면제를 받고, 시험을 다시 봐서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둘의 인연은 어긋난다.

윤성희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들이 다시 재회하는 곳은 민정 어머니 사촌언니의 장례식장이다. 정민은 민정 육촌오빠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이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사는 동안 민정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식당에서 일을 하며 집안을 책임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재회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지워진 고단한 삶의 무게 탓에 민정은 이후 이어지는 정민의 연락에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 민정이 일하던 식당 사장이자 정민이 일하는 회사 부장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민정 아버지의 친구이자 정민 회사 동료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민정과 정민은 자꾸만 마주친다. 계속되는 우연의 반복 끝에 정민은 민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 번만 더 장례식장에서 만나거든 그땐 사귀자.”

인연이 분명한데, 하필이면 마주치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재회를 기대하려면 누군가의 죽음을 거쳐야만 해서, 이 남녀는 상대를 자신의 삶으로 기꺼이 환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닌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의 한 챕터이기에, 돌고 돌아 정민과 민정은 다시 한번 장례식장 앞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환하게 웃는다.

최근 가까운 사람들이 잇따라 부모상을 겪었다. 그 어떤 말도 충분한 애도가 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늘 장례식장에서 눈물만 연신 훔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최선의 애도는 결국 환대라는 걸. 그들이 다시 일상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할 때 옆에서 힘껏 같이 밀어주는 게 내 몫이라는 걸. 그게 아마도,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응원일 것이다.

한소범 기자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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