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멈춤? 세금부터 탕감하라

입력
2020.12.18 18:00
수정
2020.12.18 23:2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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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금지한 건 정부인데 임대인 책임???
공정으로 도덕영역까지 강제할 순 없어?
현 정부 공정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21년 경제정책방향 보고' 확대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21년 경제정책방향 보고' 확대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연합뉴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 전 국민의 가슴은 뭉클했다. 없는 이들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 온갖 반칙이 난무해 정직한 이들만 바보가 되는 일상, 빈익빈 부익부와 계층 고착화에 따른 병폐로 희망이 안 보이는 사회에 분노가 컸던 때라 공감을 불렀다.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란 대통령의 말엔 역사적인 소명 의식마저 느껴졌다. 공정은 핵심 국정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이 정부의 공정도 결국 내로남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니냔 지적을 낳았다. 추미애-윤석열 갈등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절차적 공정성과 정당성을 주문했지만 그 울림은 공허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의 추잡한 정치에 국민의 피로도는 임계치에 다다랐고, 그만큼 공정과 개혁의 의미는 퇴색됐다.

문 대통령에게 공정은 여전히 시대적 요구이자 전가의 보도다. 코로나19란 위기 상황에서 재계의 우려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정 경제'라는 이름으로 상법 개정안 등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젠 공정이란 잣대를 상가 임대료 등 사적 계약에도 들이댈 참이다. 문 대통령은 14일 "코로나19로 영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는 경우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이) 매출 급감에 임대료 부담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게 과연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이어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당에선 집합금지 업종에 대해 임대인이 임대료를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임대료 멈춤법’을 발의했다.

마음씨 착한 대통령의 말은 도덕적으로는 틀린 데가 없다. 그러나 시장은 선악의 영역이 아니다. 착한 임대인 운동을 통해 임대료 인하를 권장할 순 있어도 법으로 강제하는 건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선을 넘는 것이다.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선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세입자를 최대 피해자로 만든 임대차법의 과오를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방역을 위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 영업을 하지 말라고 한 건 다름 아닌 정부다. 책임을 따진다면 장사를 못하게 한 정부가 더 큰데 임대인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다. “임대인에게 임대료를 받지 말라고 하기 전에 정부부터 세금을 받지 않는 게 순서다” “국회의원과 공무원도 세비와 봉급을 받지 말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임대인도 코로나19로 피해를 보고 있는 국민이다. 모든 이를 보듬고 통합해야 할 대통령이 편가르기를 하면 세상은 험악해지고 민생은 팍팍해진다.

인민일보는 2015년 4월 '공정'에 대해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고 설명했다. 출처 인민망

인민일보는 2015년 4월 '공정'에 대해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고 설명했다. 출처 인민망


사실 현 정부의 ‘공정’은 중국의 ‘공정’과 너무 닮아 있다. 시진핑 주석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으로 ‘부강 민주 문명 조화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직업정신) 성신 우선(우호)' 등 12개 문구를 선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2015년 4월 이 가운데 공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공정은 권리를 지키는 저울이다...우리가 주창하는 공정은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강조할 뿐 아니라 '결과의 정의'까지 고려하고, 이를 사회 각계각층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 취임사와 판박이다.

공정의 가치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한 나라가 독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공정이 사회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공정과 같을 순 없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도 공정하면 결과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정의에 더 가깝다. 이마저 강제로 똑같이 나누겠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누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려 하겠는가. 자꾸 걱정만 느는 연말이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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