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유진 언니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입력
2020.12.08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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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유진'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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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르바이트였다. 염색이나 화장보다, 술을 마시고 운전면허를 따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것만이 나를 진짜 어른의 세계로 가장 빨리 데려갈 것이라고 믿었다.

집 근처 치킨 호프집에서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엄격한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않던 2009년 지방 중소 도시의 미성년자 시급은 3,300원이었다. 그렇게 7년간 요식업계를 전전했다. 종로3가의 이자카야, 삼청동의 전통찻집, 신사동의 레스토랑에서 주문도 받고 설거지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며 온갖 일을 겪고 온갖 사람들과 스쳤다.

문학동네 2020 봄호에 실린 최진영의 단편소설 ‘유진’의 주인공 (최)유진 역시 그 시절의 나와, 혹은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낯선 도시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유진은 동아리, 엠티, 과선배, 복학생, 미팅, 연애, 학회, 아르바이트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느낀다. 그나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르바이트뿐”이라, 레스토랑 ‘베네치아’에서 일을 시작한다.

최진영 작가. 민음사 제공

최진영 작가. 민음사 제공


그곳에서 유진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이)유진 언니를 만난다. 레스토랑 매니저였던 유진 언니는 유진이 성인이 되어 처음 만난 제대로 된 어른이다. 유진 언니는 영업이 끝나고 뒷정리하는 시간까지 아르바이트생 시급으로 쳐야 한다고 대신 투쟁해 준 사람이었고, 출근하면 밥은 먹었느냐고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유진에게 “너는 작가가 될 거야?”라고 물어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진 언니는 좁고 적막한 반지하 방에 살면서도 그곳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는 왜 이런 데서 살아요?”라는 질문에 “여기도 사람 사는 데고 나한테는 소중한 방이야. 너 지금은 부모님 집에서 부모님 살림을 네 것처럼 쓰고 살지. 근데 거기에 정말 네 것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줄 알았다.

소설은 그로부터 20년 뒤 주인공이 유진 언니의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듣게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진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지만, 지금의 최유진이 그때의 이유진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시절 만난 유진 언니라는 어른 덕에 최유진이 20대를 무탈하게 건너올 수 있었다는 것을 독자인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 살면서 그런 유진 언니를 한 명쯤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설렘보다도, 도대체 ‘무엇’이 될지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감당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더 크게 짓눌렀다. 하지만 그때 내 곁을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커다란 바람이 되어 나를 이곳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니 이제 막 어른의 출발선에 선 열 아홉 살들에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귀띔해주고 싶다. 앞에 놓인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지겠지만, 어디선가 유진 언니 같은 사람이 나타나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고 등을 밀어줄 것이다. 이야기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그것을 꼭 일러주고 싶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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