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

입력
2020.11.27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여기까지 살고서도 눈앞에 닥쳐야만 사태를 절감하는 게 너무 많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이었다. 한나절 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거나 원고 교정을 진행한 다음 날 아침이면 손가락을 펴거나 오므리는 게 불편할 만큼 뻣뻣하게 붓곤 했다. 아주 서서히 상태가 나빠진 데다 지인들 여럿도 유사한 증상을 달고 산다는 말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1분쯤 마사지를 해주면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을 만큼 수그러들곤 했으니까.

초여름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들어 올린 밥솥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가 잠이 덜 깬 내 발등에 떨어졌다. 아파서 주저앉은 채 욕을 해대다가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비상용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성난 마음을 다독이며 젓가락을 들었는데 아뿔싸, 그 단순한 젓가락질이 되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그날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와 초음파 검사를 했다. 28개 손가락 관절 사이 여기저기에 붓으로 대충 찍은 듯 거뭇한 점들이 나타났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골밀도는 아주 좋고 뼈의 뒤틀림도 보이지 않는다며 잔뜩 겁먹은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저 거뭇한 점들이 있는 자리에 관절염이 생긴 것이니 한동안 약을 먹고 손에 무리가 되는 일을 삼가면 나아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이의 말대로 소염제를 먹고 사흘쯤 지나자 그 며칠 도저히 힘이 붙지 않던 양손 검지가 말을 듣기 시작했다. 통증도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라고 마침 집 근처 회사에 다니는 지인들이 무보수 상주 도우미를 자처하며 나의 식사를 책임져 주겠다고 나섰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렇게 열 손가락이 집안일에서 벗어나 호강하는 몇 달 동안 내가 골똘하게 지켜본 대상이 있었다. 지난 5월에 태어난 늦둥이 조카 윤하가 성장 과정에서 보여주는 눈부신 분투였다. 처음 만났을 때 생후 보름 된 신생아는 차마 안아 보자고 나서기도 무서울 만큼 여린 생명체였다. 다시 만났을 때 생후 50일이 지난 아기는 등과 목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까르르 웃고, 말캉한 손을 뻗어 악수하고, 채 아물지도 않은 손가락 관절을 움직여 턱 아래 V자를 만들어 보려 용쓰던 동영상 속 아기는 한 달 전쯤 한쪽 접시에 담긴 콩을 한 알 한 알 집어 옆에 놓인 접시로 옮기는 연습을 했다. 그러더니 일주일 전부터는 이유식 그릇에 담긴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제 입으로 가져가기 위해 몸과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눈물겨운 몰두와 숱한 실패 끝에 마침내 한 입 넣은 아이가 성취감에 고양돼 내뿜는 저 미소라니. “옆에서 지켜보면 그렇게 맹렬할 수 없어요. 어른인 우리가 자동반사처럼 하는 모든 움직임이 저렇게 눈물겨운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거구나 싶고….” 전화기 너머 올케가 말했다.

윤하가 그렇게 풀쩍 성장하는 사이 내 열 손가락은 악화할 때 속도처럼 서서히 낫고 있다. 착한 가족들 덕에 올해 가을걷이에서도 김장에서도 열외가 되었지만, 자칫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낼 때면 찌릿한 통증으로 손가락은 경고장을 날린다. 알았어, 조심할게. 혼잣말하며 속도를 늦추면서 다시 움츠러든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내 몸과 정신이 나에게 무언가를 청구해 올까 봐. 생각해 보면 거저 생기는 건 하나도 없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