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산시장 도전자라면 카멀라 해리스처럼

입력
2020.11.24 18:00
수정
2020.11.24 18:20
26면

젠더 이슈 던진 카멀라, 국내라면 어땠을까
양대 단체장 재선거, 사건규명은 뒷전으로
여성과 성평등 언급 당당한 지도자 나오길


당선이 확정된 직후 연설하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AP 연합뉴스

당선이 확정된 직후 연설하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AP 연합뉴스


"여성들은, 흑인 여성들을 포함해, 평등과 자유, 정의를 위해 싸우고 희생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 자주 간과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그들이 민주주의의 중추(backbone)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미국의 49대 부통령 당선인인 카멀라 해리스가 당선이 확정된 직후 한 연설에서 한 말이다. 자신은 첫 번째 여성, 첫 번째 흑인 여성, 그리고 첫 번째 아시아계 부통령이지만, 자신이 마지막은 아닐 것임을 강조했다. 연설의 말미에 그는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모든 어린 소녀'에게 "꿈과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라"고 격려했다. 청중은 환호했다.

같은 메시지가 한국사회에서 던져졌다면 어땠을까? 인터넷 댓글에서는 '페미'라는 수식어와 함께 비난이 빗발쳤을지 모른다. 언론에서는 근엄한 목소리로 "편협한 인식이 걱정스럽다"는 꾸짖음이 당선 축하 메시지를 압도했을지 모른다. 정치인들은 "'왜 굳이 '여성'을 들먹여 시끄럽게 만드냐"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려 할지 모른다.

몇 해 전 국회 토론회에서 만난 한 의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젠더 이슈를 다루고 싶었지만, 보좌관들이 말려서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얻을 것이 별로 없고 성평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다간 지지보다 비난에 직면하기 쉬울 것이라는 계산이다. 대중의 지지가 생명인 정치인으로서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는 매우 아쉬워했다.

내년 봄 서울과 부산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이 소란하다. 혹자는 여성 후보에게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유력한 여성 후보에게 가산점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 주장한다. 각자 정치 현실을 해석하고 계산하는 셈법이 다르겠지만, 핵심 질문은 피하고 있다. 우리가 왜 한국의 첫째, 둘째 도시에서 시장 선거를 다시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장의 지위에 오른 그들이 가장 가깝고 힘 없는 여성들에게 권력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 했던 사건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사건의 진실은 규명되고 있는가? 피해자가 피해고소인으로 불려야 했던 현실, 계속되는 2차 가해의 현장은 바로잡히고 있는가? 피해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고 용감하게 이 질문들을 제기하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도, 언론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비난이나 불이익이 걱정스러울 수도 있고, 당장 다가올 선거에서 자기편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너무나 복잡한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한국의 언론들이 아직 지식도, 경험도, 기술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한 가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성 차별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저항이 크다는 것은 바로 그만큼 한국 사회가 오랜 가부장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여성 혐오 문화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서울과 부산 시장에 도전하려는 이들의 첫 번째 자격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 있는 답변을 찾으려는 의지와 성인지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 세계에서 카멀라 해리스 같은 인물은 없는 것일까? '여성'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평등'에 대한 말하기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오염시키지 않는 그는 누구일까?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ㆍ전 한국여성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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