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에 드리운 희망의 빛

입력
2020.11.3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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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누온 팔리(Nuon Phaly)의 기적

누온 팔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생존자로 수많은 여성과 고아들에게 새 삶을 선사했다. bytheseatofmyskirt.com/

누온 팔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생존자로 수많은 여성과 고아들에게 새 삶을 선사했다. bytheseatofmyskirt.com/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1975~1979)의 '킬링필드' 생존자 누온 팔리(Nuon Phaly, 팔리 누온, 1942~2012.11.27)는 공산정권 붕괴 후 상처 입고 오갈 데 없는 여성들과 함께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가르쳐 자립하게 하는 데 생을 바친 여성이다. 그가 수도 프놈펜 교외에 93년 세운 '희망의 빛 고아원(Future Light Orphanage)'은, 그가 교통사고로 숨진 지금도 18세 미만 고아 287명이 오누이처럼 서로를 돌보며 컴퓨터와 영어를 배우며 사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중산층 출신인 그는 폴 포트 집권 당시 세째를 임신한 두 아이의 엄마였다. 국영 유리공장 간부였던 남편은 '부르주아'여서 끌려갔고, 만삭의 누온은 12세 딸과 3세 아들과 함께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그는 세 아이와 남편을, 고문 후유증과 집단강간살해, 기아로 차례로 잃었고, 그 사연의 일부는 앤드루 솔로몬의 책 '경험수집가의 여행'에 소개돼 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더 큰 기적은 가족을 잃고 생의 의지마저 잃었던 그가 그 죽음의 땅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딛고 재활의 싹을 틔운 거였다. 여성으로선 드물게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 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그 언어의 힘으로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해 동포의 집단 우울증심리치료센터를 열고, 거기서 힘을 추스른 여성들과 함께 고아원을 열었다.

그가 소개한 트라우마 극복의 3단계는 망각과 학습, 사랑이다.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게 하는 법은 사실 없겠지만, 함께 배우고 노동하며,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 잊음의 방편임을, 육체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감정적 고립을 극복하는 일임을 그는 스스로 깨우쳤다. 그 터전이 '희망의 빛'이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에 공산 폴 포트 정권이 끼친 최악의 해악 중 하나로 "우리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를 속여야만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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