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다시 날게 하리라, 아테네의 헤르메스

입력
2020.11.19 22:00
27면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게티이미지뱅크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게티이미지뱅크


이 드넓은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도시들이 수두룩하지만 아테네란 이름이 낯선 이는 많지 않다. 결국엔 포기한 수학책이라도 앞부분은 손때가 꼬질꼬질 타 있는 것처럼, 서양사의 첫걸음을 장식하는 고대 그리스 세계와 그 중심에 섰던 아테네만큼은 모두가 한번쯤 펴 본 페이지인 셈이다. 그렇다고 여행상담을 청하는 이에게 선뜻 추천하기도 어려운 도시다. 민주주의는 물론 어쩌면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모든 문화의 밑그림을 그린 도시국가 시절의 아테네는 이미 기원전의 이야기이고, 이런저런 주변 제국의 식민지로 오래 산 역사에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던 근대와 오늘날의 경제상황까지 합쳐지다 보니 현재 남은 경관이 큰 매력이 없는 탓이다. 너무 유명한 곳이라 여행자의 기대가 커진 만큼 현실은 더 비루하고 쪼그라들어 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미건조해 보이는 도시의 틈새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옛 시간을 느끼는 순간, 아테네는 그 어디보다도 특별한 도시가 된다.

첫 배낭여행이 조금은 교육적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아테네에 도착한 나를 기다린 건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열린 페스티벌이었다. 2000년전 지은 극장의 차가운 돌 의자에 앉아 비록 그 뜻도 몰랐지만 연극의 기원이라는 고전극을 보며, 그 순간에 주위를 감싸던 아테네의 밤공기와 음악 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영영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장면은 우뚝 솟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휘날리던 그리스 국기였다. 흰색과 파란색이 선명하게 그려진 커다란 깃발이 파르테논 신전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머리 위에서 펄럭이던 소리는 지금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난 평생 여행하는 사람이 되겠구나, 신전의 기둥이 수 천 년을 기다렸다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의 숙소에서 잠들었던 그날 밤,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고 기억한다면 그건 착각이었을까?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견된 헤르메스 두상. AFP 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견된 헤르메스 두상. AFP 연합뉴스


이번 생에서는 여행이 끝난 게 아닐까 의구심이 커지던 요즘, 아테네의 하수도 공사현장에서 기원전 300년쯤에 만든 헤르메스 두상이 발견됐다. 사실 아무 연관도 없는 우연이겠지만 백신개발의 희소식과 함께 들려오니 좋은 징조는 아닐까 살짝 설렜다. 국경을 넘는 게 일상인 여행작가에게 상인과 방랑자를 수호하는 여행의 신 헤르메스는 좀 각별한 의미다. 경계를 넘나들며 어디든 돌아다니는 전령이라 마땅한 신전도 잘 남아 있지 않고, 그저 길 한 켠에 이정표 삼아 돌무더기를 쌓으며 헤르메스를 기렸다고도 한다. 우리 나그네들이 동네 어귀에 하나씩 돌을 더했던 것처럼, 아마도 먼 길을 떠나며 내내 안전을 기원했으리라.

자칫 사랑에 빠져 게을러질까 걱정하던 아버지 제우스를 뒤로 하고 헤르메스가 택한 배우자는 인간으로서 이성의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필로로기아였다. 천상의 의사소통을 관장하는 신과 자연에 대해 연구하는 인간의 결합인 셈인데, 훗날 중세대학에서 제도화된 학문의 탄생배경이다. 물론 1600년 전의 작가가 7가지 교양학문을 의인화한 우화이긴 한데, 백신임상시험 역시 그간 인류가 쌓아 온 학문을 바탕으로 총력을 기울인 결과이기에 둘의 결혼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헤르메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모자와 신발을 가진 것처럼 다시 자유롭게 나는 날이 올는지, 오랫동안 하수도에 숨어 있던 그가 반가운 전조를 전하는 것이면 좋겠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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