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1등은 죄를 지어도 괜찮은 세상

입력
2020.11.17 22:00
수정
2020.11.18 11:59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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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 학생이 있습니다. 악성 댓글에 허위 사실 유포로 한 유명인을 결국 사회적 매장에 이르게 한 청소년입니다. 고소장이 접수된 후, 그의 부모는 아연실색하며 이렇게 검찰에 호소합니다. “제 아들은 전교 1등을 하는 등 모범생입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교 1등을 하는 모범생. 그러니 (죄를 지었어도) 선처를 바란다. 라는 문장 말입니다. 이 문장에는 세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학업 만능주의가 오롯이 담겨 있기도 하지요.

첫 번째, 전교 1등을 모범생으로 치환하는 말은 과연 정당할까요? 모범생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성적과 품행이 방정하여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될 만한 학생입니다. 즉 모범생이라는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해당 학생이 성적우수자이면서 품행이 방정한,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인 사람이어야 하는 거지요. 고질적 악성 댓글로 여성 연예인을 자살로 몰고 가거나, 허위 사실 유포로 유명인의 사회적 매장을 야기한 사람에게는 ‘품행 방정’이라는 항목이 성립될 수 없음은 분명하고요.

그렇다면 둘째, 백번 양보해서 모범생은 아니어도 우등생이라 한들, 성적이 우수한 아이라는 이유는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선처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만약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선처가 행해진다면 그 아이는 어떤 생각을 가지며 자라나게 될까요?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특혜이며, 그것을 누리는 나는 특수한 계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나는 단지 공부를 잘했을 뿐인데, 그 이유로 내 부모는 내 (학업과는 하등 무관한) 범죄를 선처해달라고 호소하고요. 또 법원은 그걸 받아들여 줬으니까요.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나보다 공부를 못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에서 굳이 룰을 지킬 필요를 느낄 수가 없을 겁니다. 나는 다른 ‘계층’이니까요.

여기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쟁점은 발생합니다. 상기한 저 부모의 선처 호소가 낯설지 않다는 점, 즉 우리 사회에서 자주 호소되어 오던 맥락이라는 겁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죠. 공부를 잘하는 아이이니, 미래가 창창한 명문대생이니 선처해달라고 떼를 쓰고, 또 그것이 종종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것이 정말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일까요? 어쩌면 누구보다 영리하고 똑똑한 그들에겐 ‘앞으로 교묘히 살아갈 꿀팁’의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전문직이 되고, 의료인이 되고, 법조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배운 ‘일탈 꿀팁’을 유용하게 써먹겠지요. 특혜받는 계층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배웠으니까요. 그 습관이 자라고 자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숱하게 비난받는 ‘입시 비리’라든지, ‘뇌물 수수’의 주인공들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역시 전교 1등이었고, 명문대생이었고요.

서론에 언급했던 그 전교 1등은 지금도 사과문을 열심히 써내는 중이라는데, 과연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은 봐줄 테니 앞으론 그러지 말아라’일까요? 그 말은 정말로 그를 교화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에게, 그리고 지금 만연한 자칭 특권계층에 진짜 필요한 말은 이것 아닐까요? “네가 그 무엇이든 간에 너의 잘못은 타인과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선처는 없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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