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까지 비칠라…잔잔한 수면에 늦가을 데칼코마니

입력
2020.11.17 17:00
수정
2020.11.17 18: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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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하기 좋은 횡성호수길 5구간

강원도는 역시 겨울이 빠르다. 양평에서 횡성으로 접어들면 도로 주변 색깔부터 달라진다. 노란 은행잎은 거의 찾기 힘들고, 소나무와 낙엽송을 빼면 산도 이미 황갈색이다. 기온의 변화를 실감한다. 사색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잔잔한 횡성호 수면에 은사시나무가 거꾸로 뿌리를 내린 듯 비친 모습. 횡성호수길 5구간은 굴곡이 심해 호수 속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다.

잔잔한 횡성호 수면에 은사시나무가 거꾸로 뿌리를 내린 듯 비친 모습. 횡성호수길 5구간은 굴곡이 심해 호수 속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다.



산 높은 강원도에서 대형 호수는 낯설고 반갑다. 횡성호는 비교적 최근인 2001년 횡성댐 건설로 생겼다. 다목적댐 치고는 규모가 아담한 편이다. 그래도 그 물속에 갑천면의 중금리 부동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5개 마을이 잠겼고, 900명 넘는 주민이 이주해야 했다. 호수 남측에 망향의 동산이 있다. 수몰지구에서 값어치 있다는 유물을 옮기고 고향을 추억할 전시관도 세웠다. 중금리 삼층석탑이 호수 건너 어답산을 배경으로 쌍탑으로 서 있고, 마을의 오랜 비석을 옮겨 세우고 물에 잠긴 화성초등학교 연혁도 새겼다. 수몰 지역 주민들의 삶의 자취를 모아 놓은 전시관의 유물은 그리 오랜 과거가 아닌데도 까마득한 옛날 풍경 같다.

횡성호수길 5구간 시작 지점인 망향의 동산에 수몰 지역에서 옮겨 온 중금리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 시작 지점인 망향의 동산에 수몰 지역에서 옮겨 온 중금리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 시작 지점인 망향의 동산에서 보는 일출 장면.

횡성호수길 5구간 시작 지점인 망향의 동산에서 보는 일출 장면.

실향민의 아픔이 서린 호수 주변에 6개 구간 31.5km의 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이름하여 ‘횡성호수길’이다. 그 중 5구간은 호수 내부로 길쭉하게 뻗은 지형을 한 바퀴 돌아온다. A코스와 B코스(각각 4.5km)로 구분되는데 전체 구간이 호수와 접해 있다. 최근 개설한 B코스는 특히 굴곡이 심하다. 수면 위로 가늘게 남은 능선과 산허리를 걷는다.

그릇에 담긴 물은 높낮이가 없이 참 공평하다. 일부 구간에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등고선 따라 새로 낸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어 걷기에 힘들지 않다. 들쭉날쭉한 물길 지형은 호수 안에 또 호수를 만들었다. 한참을 걸어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과 낮은 산자락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황갈색 일색인 산자락에 군락을 이룬 자작나무숲은 정확히 수면을 기준으로 분리돼 빗살무늬 데칼코마니를 연출한다.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한 은사시나무도 비친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에 거꾸로 뿌리내린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내면을 응시한다. 잔잔한 수면에 속마음까지 비칠 것 같다.

횡성한우 캐릭터을 내세운 횡성호수길 안내판.

횡성한우 캐릭터을 내세운 횡성호수길 안내판.


횡성호수길 5구간 초입의 '장터 가는 가족' 조형물. 횡성호수길에서 유일하게 남은 옛길 흔적이다.

횡성호수길 5구간 초입의 '장터 가는 가족' 조형물. 횡성호수길에서 유일하게 남은 옛길 흔적이다.


횡성호수길 5구간. 물위로 드러난 낮은 산자락이 수면에 비쳐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 물위로 드러난 낮은 산자락이 수면에 비쳐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의 자작나무 조형물. 장식이 요란하지 않아서 걷는 데만 집중할 수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의 자작나무 조형물. 장식이 요란하지 않아서 걷는 데만 집중할 수 있다.


자작나무 조형물과 벤치, 전망 덱 몇 개를 제외하면 횡성호수길에는 요란한 장식물이 없다. 밋밋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잡생각 없이 오로지 자신을 돌아보고 걷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누구나 걷기 편해 ‘가족길’이라 이름 붙였지만, 늦가을 서정에 깊이 빠져 들기에는 오히려 홀로 걷는 게 제격이다. 5구간 전체 코스를 돌면 3시간가량 걸린다. 입장료는 2,000원은 전액 횡성관광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횡성호수길 5구간은 전체가 호수를 따라 걷는 길이다.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친 산과 나무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횡성호수길 5구간은 전체가 호수를 따라 걷는 길이다.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친 산과 나무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횡성호수길 5구간. 건너편 산자락의 자작나무 군락이 수면에 비쳐 빗살무늬 작품을 그리고 있다.

횡성호수길 5구간. 건너편 산자락의 자작나무 군락이 수면에 비쳐 빗살무늬 작품을 그리고 있다.


아기자기한 B코스를 돌아 나오면 호수 건너편에 높은 산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호수가 담지 못할 정도로 큰 산이다. 진한의 마지막 임금인 태기왕이 다녀갔다 해서 어답산(789m)이라 한다. 횡성에서 가장 높은 태기산(1,261m) 역시 태기왕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정상 부근에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돼 있어 차량(SUV만 가능)으로 올라갈 수 있다. 대형 바람개비 뒤로 펼쳐지는 전망이 시원하고 해질 무렵 노을이 특히 아름답다. 변화무쌍한 날씨도 높은 산의 매력이다. 모였다 흩어지며 산자락을 휘감는 안개가 몽환적이다.

횡성=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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