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밑' 슬픈 역사와 기억들

입력
2020.11.2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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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영도대교 완공

옛 영도대교는 대형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상판 한 쪽을 드는, 동양최대 일엽식 도개교였다. busan.grandculture.net

옛 영도대교는 대형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상판 한 쪽을 드는, 동양최대 일엽식 도개교였다. busan.grandculture.net


부산 영도와 남포동을 잇는 길이 214.8m 영도대교가 1932년 4월 20일 착공해 1934년 11월 23일 완공됐다. 국내 최초 연륙교이자 , 뱃길을 열어주기 위해 대교 한쪽이 들리는 동양 최대 일엽식 도개교(跳開橋)였고, 당시 공식 이름은 '부산대교'였다. 준공식 당일 부산 시민의 약 3분의 1인 5만여명이 현장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1982년 현 부산대교가 준공되면서 이름은 영도대교로 바뀌었지만, 시민들은 처음부터 '영도다리'라 불렀다. '귀신다리'라 부른 이들도 있었다. 호안 매립공사와 접속도로 건설 과정에 토사 붕괴 등으로 조선인 노무자들이 부지기수로 숨졌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궂은날이면 원혼들이 다리 주변을 배회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한다.

영도대교는 영도를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부산의 부도심으로 개발하기 위해 총독부와 부청이 벌인 사업이었다. 당시 영도는 밤에는 나룻배가 끊겨 뭍과 왕래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듬성듬성 살던 동네였고 당연히 개발 여지가 많았다. 부산부청도 대교 인근인 현 중앙동 부산제2롯데월드 부지에 있었다.

6·25 전쟁으로 영도대교는 또 한 번 현대사의 현장이 됐다. 부산 피란길에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여든 장소였다. 만일 헤어지면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한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영도다리'는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다. 재상봉의 희망을 품고 한시도 떠날 수 없어 교각 아래에 천막을 엉구어 산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고아도 많았다. 서부경남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에게 '영도다리'는, 짓궂은 어른들이 아이를 놀릴 때 즐겨 동원한 '태생의 비밀'이 서린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나'를 주워온 곳이었다. 그들에게 영도대교는 물리적 구조물이기 이전에 실존적 상처의 형이상학적 상징이었다.

1966년 영도에 상수도 배관이 연결되면서 다리는 고정식으로 바뀌었고, 제2롯데월드 계획이 서면서 2007년 시작된 확장 공사로 2013년 11월 왕복 4차선에서 6차선으로 넓어졌다. 새 다리는 도개기능도 갖추었다. .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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