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혁명 양질전화의 봉화를 지피다

입력
2020.11.02 04:30
셰어 하이트(Shere Hite, 1942.11.2~ 2020.9.9)

셰어 하이트는 1976년 '하이트 리포트, 여성의 성'을 비롯한 일련의 저서로 60년대 시작된 성혁명의 질적 전환에 불을 지폈다. 그는 방대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삽입오르가슴만이 진짜 오르가슴'이라는 당대의 성의학계 및 주류사회의 통념을 허물고, '음핵'의 재발견을 통한 쾌락의 평등, 그 평등을 향한 질적 도약의 발판을 놓았다. 그의 방법론은 비과학적이었지만, 그의 통찰은 '역사의 심판'에서 승리했다. 1990년 파리 시절의 하이트. AFP, Getty Image.


미국 1960년대 신좌파운동과 히피즘을 도식적으로 대비하자면, 전자는 대학 캠퍼스나 거리에서 반전 평화와 시민권 확장을 위해 세상과 맞섰고, 후자는 세상을 적당히 등진 집 거실이나 극장, 주류 관습과 부르주아적 삶의 양식이 스미지 않은 빈 들판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실험했다. 하지만, 사뭇 달라 보이는 둘은 기성 권위·질서에 대한 저항이라는 유전자를 공유한 쌍둥이였고, 해체와 재구성의 두 트랙을 나눠 달린 '반(反)문화'의 한 팀이었다. 두 거대한 파문은 가장자리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겹칠 수밖에 없었다.

'성(性)'의 영역에서 후자는 프리섹스의 '성 혁명'을 주도했다. 1920년대 말 '오르가즘의 기능'이란 책으로 국가-사회-가부장 권위가 억압해온 성의 해방을 통해 탈권위-탈파시즘의 미래를 꿈꾼 당대의 이단아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가 그들의 칼 마르크스였고, 콘돔과 경구피임약이 혁명의 화염병이었다.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주역들, 특히 급진 페미니즘 진영도 대체로 성 혁명에 공명했다. 다만 그들은 쾌락의 해방 못지않게 쾌락의 평등을 중시했다. '뉴욕의 급진여성들(NYRW)'의 창립 멤버 앤 코트(Anne Koedt, 1941~)68년 '질 오르가슴의 신화(The Myth of the Vaginal Orgasm)'란 에세이에서 '여성의 성적 쾌락은 삽입섹스를 통한 질 자극보다 음핵(Clitoris) 자극에 더 의존한다'며 프로이트 이래의 주류 성 과학과 상식에 반기를 들었다. 성의 절정에 도달하는 데 남자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거기 닿지 못하는 게 여자들의 잘못이나 결함(불감증) 탓만은 아니라는 주장을 담은 그의 팸플릿은 60,70년대 여성들의 '복음'이었다. 비혼-탈혼, 레즈비언 진영이 특히 환호한 건 당연했다.

물론 의학계는 코트의 에세이를 페미니즘의 히피적 도발이나 '매스터스&존슨'의 1966년 책 '인간의 성 반응'의 아류 쯤으로 무시했다. 워싱턴대 부인과 전문의 윌리엄 매스터스와 버지니아 존슨은 지원자 692명(여성 310명)의 성행위를 실험실에서 관찰하고 생리적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음핵 자극의 폭발력을 확인했다. 다만 그들이 주목한 건 성행위 도중 음핵에 가해지는 부수적 자극이었고, 전제는 삽입섹스였다. 그에 반해 코트의 에세이는, 말하자면 음핵 독립 선언이었다.

음핵의 진정한 독립 선언

하지만, 음핵의 진정한 독립은 셰어 하이트(Shere Hite)의 1976년 책 '하이트 리포트, 여성의 성(The Hite Report on Female Sexuality)'로 시작됐다고 해야 한다. 그는 기존 성과학자들처럼, 성 노동자나 재소자, 유급 지원자를 대상으로 실험하거나 인터뷰한 게 아니라, '평범한' 여성 3,500여명에게서 무기명 주관식 설문지를 받아 분석했다. 그는 책에서 미국 여성 약 70%가 삽입섹스로는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며 82%는 자위로 욕구를 충족한다고 밝혔다. 대다수 여성이 삽입섹스를 하며 흥분한 척 연기(fake orgasm)한 적이 있고, 그 때문에, 또 자위로 대리만족 하면서 죄의식을 느낀다고도 썼다.

'하이트 리포트'는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급부상, 매거진 'Ms'의 표현을 빌자면 당대 주류 성의학에 지진을 일으키며 침실 혁명의 불을 당겼다. '비행 공포(Fear of Flying, 1973)'란 책을 쓴 에리카 종(Erica Jong)은 "하이트의 질문지에 응답한 여성 대다수에게 당시의 '성 혁명'은 신화에 불과했다. 그들은 '예스(성적 제안에 대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됐을 뿐 '노'라고 말할 순 없었다.(...) 섹스의 양은 늘었지만, 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이트는 "모름지기 연구자는 여성에게 어떤 성감을 느껴야 한다고(should feel) 말해선 안되고, 어떤 성감을 실제로 느끼는지(do feel) 물어야 한다"며, 남성 위주 주류 성의학계를 훈계했다.

음핵의 재발견으로 성 혁명의 양질전화(量質轉化)를 주도한 셰어 하이트가 9월 9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60년대 성혁명은 신좌파운동과 히피즘운동의 주요 접점 중 하나였고, 경구피임약의 등장은 성의 양적 성장에 기여했다. 급진 페미니즘의 깃발은 성의 질적 성장, 즉 쾌락의 평등이었고, 하이트의 저서는 그 깃발에 쏟아진 눈부신 광채였다. womensrepublic.net


셰어 하이트는 1942년 11월 2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 조셉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에서 성장했다. 군인이던 남편과 16세에 그를 낳은 어머니는 종전 직후 트럭 기사와 재혼했고, 50년대 중반 다시 이혼하면서 딸을 플로리다의 외가에 맡겼다. 딸의 불안정한 삶이 마뜩지 않았을 할머니는 손녀를 더 보수적으로 키웠던 듯하다. "성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할머니는 내가 남자친구와 집 현관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남자들이란 정숙한 여자와만 결혼한단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부의 성(Hite)에 직접 이름(Shere)을 지어 붙일 만큼 독립적이던 하이트는, 모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플로리다대 사학과(63년)와 대학원(66년)을 졸업했고, 60년대 저 파문의 진앙지 중 한 곳인 뉴욕으로 옮겨 컬럼비아대 박사과정(사회사)에 진학했다.

하지만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하이트는, 세상을 기웃거렸을 뿐 선뜻 뛰어 들진 못했다. 책으로 '대박'을 친 이듬해인 77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제야 삼시세끼 밥을 챙겨먹을 수 있게 됐고, 집주인을 피해 숨어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잡지 '플레이보이'도 하이트의 아르바이트 일자리 중 하나였다. 그의 외모는 훗날 텔레그래프가 "늘씬한 몸매에 우아한 금발의 전형적 '핀업 걸' 미모에(...) 전성기 리타 헤이워스에 필적하는 뇌쇄적(sex-siren mode) 매력"을 지녔다고 소개할 만큼 도드라졌다. 하이트를 모델로 한 '올리베티(Olivetti)' 타자기 광고가 공개된 건 72년이었다. 하이트가 자판을 애무하듯 건드리는 사진 곁에는 '똑똑한(smart) 타자기에는 똑똑한 타이피스트(She)가 필요 없다'는 문구가 실렸다.

여성(의 외모와 지성)에 대한 저 지독한 편견과 비하에 성난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올리베티 본사 앞에 모였다. 그 대열의 맨 앞줄에 광고 모델 하이트도 있었다. 그가 전미여성기구(NOW)에 가입, 페미니즘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해부터였다.

당시 그는 "논문 주제로 여성 성을 택했다가 퇴짜 맞고" 대학원을 자퇴한 상태였다. 어느 날 NOW 회원들과 토론 도중 '오르가슴' 의제가 나오자, 코트의 에세이를 이미 읽었을 그들조차 대부분 자기 이야기를 꺼렸다고 한다. 할 말이 많았을 하이트에게 참가자 중 한 명이 '그럼 당신이 제대로 파보라'고 제안했고, 그 직후 여성 3,500여 명에게 우편 설문지를 돌려 쓴 게 '하이트 리포트'였다. 출판 비용을 빌려 초판 2,000부를 찍은 책은, 아랍어를 포함 수많은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최소 4,800만 부가 팔렸다.

오르가슴에 대한 난데없는 우열 판정

노르웨이 두 여성 의학자가 쓴 여성 성 개론서 '질의 응답'(김명남 옮김, 열린책들)에는,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 상식적 통념이던 음핵 오르가슴이 "꽤 최근에 웬 남자가 저지른" 진짜-가짜 오르가슴 우열 판정 때문에 묻혀버린 사실이 소개돼 있다. 그 '웬 남자'가 프로이트였고, 판정 근거가 '자기 머릿속' 생각이었다. "그는 음핵 오르가슴을 어린 여자아이의 침실에서만 벌어지는 일로 간주했다. 또 여자아이가 남자에 흥미를 품는 순간 음핵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삽입에의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남녀의 결합만이 건전한 섹스이고,(...) 진정한 여성은 질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했다."

셰어 하이트는 2006년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하이트 리포트'의 폭발력을 두고 "여성에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줬기 때문"이고, "성 평등을 위해서는 성(쾌락)의 등식이 전제돼야 한다는 걸 일깨워준 덕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 출간 이후 하이트는 9.11 이후의 오사마 빈 라덴만큼 '유명'해졌다. 하지만 '학술적 커리어(academic life)'의 징검다리가 되어 주리란 기대와 달리 '대중문화(popular culture)'적 이슈의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일부 언론은 '하이트 리포트'를 '헤이트(Hate, 증오) 리포트'로 셰어 하이트를 '시어 하이프(Sheer Hype, 순전한 허풍)'라 부르며 조롱했고, 보수 종교계는 가히 '마녀사냥'의 열정으로 그를 성토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바버라 에런라이크, 스티븐 제이 굴드 등 12명은 "여성 인권에 대한 보수적 백래시"라며 그를 옹호했다.

하이트는 13~97세 남성 7,239명 설문을 통해 81년 펴낸 두 번째 책 '남성의 성(The Hite Report on Men and Male Sexuality)'에서 남성들이 겪는 성적 무기력에 대한 깊은 불안과 공포, 그로 인한 친밀감의 결핍을 폭로했고, 여성 4,500여명의 설문 결과이자 3부작 완결편인 87년 책 '여성과 사랑(Women and Love: A Cultural Revolution in Progress)'에선 기혼 여성 70%가 최근 5년 사이 혼외정사를 경험했고, 98%가 성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며, 95%가 남성 파트너의 정서적 학대를 경험했다는, 기존 유사 연구와는 판이한 충격적인 결과를 공개했다.

'통계의 오류가 곧 통찰의 오류는 아니다'

학계의 진지한 반박은 87년 책 이후 본격화했다. 한 마디로 '과학적 사회조사방법론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사이비 과학'이라는 거였다. 조사 대상이 NOW 회원 등 페미니스트에 편중돼 있어 대표성이 없고(샘플링 오류), 설문지를 받은 10만 명 중 응답한 건 불과 4,500명이며, 그들이 나머지 9만5,500명의 생각과 성생활을 대변할 순 없다는 거였다. 런던데일리메일은 '구체제 알바니아의 선거 결과'에 비유했고, 뉴욕타임스 서평 담당 기자는 '공상인문과학소설'이라고 비판했다. 버클리대 사회학과의 앨리 혹실드(Arlie R. Hochschild)의 서평이 그나마 우호적이었는데, 그는 "이 연구를 과학의 범주에 넣을 순 없지만(...), 통계의 수상쩍음을 통찰의 수상쩍음으로 해석하는 게 꼭 옳다고 볼 수도 없다"고 썼다.

하이트는 "내가 받은 응답지 대부분은 14~15페이지씩 손으로 쓴 글이었다. 상상할 수 있나? 온 가족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밤에 혼자 식탁에 앉아 쓴다고 밝힌 글도 있었다. 나로선 그들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지금도 나는 그 응답지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년의 통계 및 사회조사 이론서들은 대중잡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1936년 미국 대선 여론조사와 함께 하이트의 방법론을 '편견으로 오염된 사회조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곤 한다.

'하이트 리포트' 첫 책을 낸 1976년의 셰어 하이트. 그는 진정한 성혁명, 성혁명의 질적 완성은 음핵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렸고, 페미니즘 제2의 물결에 기여했다. Life Images, 게티 이미지.


하이트는 비판과 모욕, 심지어 위협에 시달렸다. 그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건 기자에게 다른 사람인 척 위장해서 반박했다가 들키기도 했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는 '미국사회학회장도 내 방법론에 동조했다'고 거짓말했다가, 확인차 연락한 기자에게 학회장이 '읽어본 적도 없다'고 밝히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약 20년 연하의 독일인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회리케(Friedrich Hoericke, 1963~)와 85년 결혼했던 그는 95년 "자유로운 연구를 위해"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로 귀화했고, 99년 이혼한 뒤 폴 설리번(Paul Sullivan) 이란 이와 재혼해 해로했다.

한창 때의 그는 모델 이력과 화려한 외모, 한사코 고수하던 화장 탓에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도 적잖은 공격을 받았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는 평생 자신의 성생활을 포함한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기피했고, 알려진 바 자녀는 없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지내며 말년까지 가부장 문화와 그로 인한 여성의 여성혐오 등에 대한 에세이와 자서전 등 9권의 책을 더 펴냈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강연했다. '여성과 사랑' 개정판 끝에 자신의 연구 방법론 일반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고 해명한 에세이를 따로 싣기도 했던 그는 2006년 인터뷰에서 "이제는 내 연구가 (과학의 궁극적 심판인) 역사의 심판에서 살아 남았다는 말로 저 모든 시비에 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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