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삼성 노조탄압의 역사, 이건희 회장과 함께 끝나야"

입력
2020.10.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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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선대 회장의 유훈 '무노조 경영'
이건희 회장 때도 이어져
3대 이재용 부회장이 5월 공식 종식

한국노총과 삼성그룹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노동3권 침해 규탄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노총과 삼성그룹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노동3권 침해 규탄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에 노동계는 명복을 빌면서도 “삼성의 노동조합 탄압은 명백한 과오”라고 생전 이 회장의 과를 지적했다. 삼성은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남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조는 안 된다”는 유훈에 따라 80여년간 무노조 경영을 이어오다 이재용 부회장 체제인 올해 5월에야 공식적으로 노조 활동을 인정했다.

25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논평을 내고 “고인의 생에 공과 과가 뚜렷했다”고 평가했다. 한국노총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도 “세계적인 기업 삼성이 빛을 내는 데 있어서 정경유착과 무노조 경영, 노동자 탄압은 짙은 그늘"이었다고 평가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이건희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삼성은) 노조개입을 중단하고 노조파괴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등 환골탈태를 해야한다"고 밝혔다. 노동인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 역시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은 언제나 삼성의 이윤 뒤로 밀려났다”며 “삼성의 어두운 역사는 이건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그룹은 지난 1938년 창립 이래 줄곧 노조에 적대적이었다. 본격적인 무노조 경영이 시작된 것은 1977년 ‘제일제당 미풍공장 사건’이다. 미풍은 삼성이 조미료 ‘미원’을 따라잡기 위해 만든 브랜드다. 당시 미풍공장의 여성노동자의 월급은 2만176원으로, 그 시절 여성노동자 최저생계비 4만5,053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이에 직원 13명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노조를 설립했지만, 제일제당은 노조원들의 친인척을 겁박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노조를 와해시켰다.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행 노동조합법상 기업이 노동자의 노조 설립을 방해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다. 삼성은 그러나 사용자가 설립을 주도한 노조, 일명 ‘어용노조’를 통해 그룹 내 노조행위를 합법적으로 막아왔다. 당시 법이 한 사업장내 단 하나의 노조만 허용한 것을 이용해, 노조 설립 시도가 있을 때 마다 사측이 먼저 설립신고를 하는 식으로 근로자 중심의 노조 설립을 무력화했다. 과거 삼성생명ㆍ증권 등 9개 계열사 노조가 이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2011년 7월 노조법 개정으로 사업장 내 복수노조가 허용되면서 그 해 삼성에도 사실상 첫 노조인 삼성에버랜드 노조가 설립됐고, 2년 뒤엔 삼성전자서비스노조가 출범했다. 하지만 삼성은 미래전략실(미전실)을 중심으로 노조와해 공작(일명 ‘그린화 전략’)을 벌여 노조 활동을 암암리에 방해했다. 노조설립 움직임을 사전 차단하고, 노조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어용노조를 만들거나 협력사를 기획 폐업시키고, 조합원을 미행하거나 노조탈퇴를 종용하는 방식 등을 동원했다. 작년 12월 서울중앙지법은 삼성 임원들의 노조법 위반, 업무방해 등 혐의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무노조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창업주부터 이어 온 노조를 향한 삼성의 적대감과 탄압의 역사는 지난 5월에서야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삼성의 노조 문제로 인해 상처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며 “노조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삼성화재, 삼성디스플레이 등 주요 계열사에도 노조가 설립돼 사측과 교섭을 진행 중이다. 진윤석 전국삼성전자노조위원장은 “고인이 삼성을 발전시켜온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고충을 살펴봤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그간 노조에 부정적이던 사내 분위기가 조금씩 변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종=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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