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기술탈취’ 두 얼굴

입력
2020.10.19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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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기업 기술탈취 우려로 ‘공정3법’ 반대
협력중소기업엔 무자비한 기술약탈 갑질
대기업 앞장서 상생 비즈니스 풍토 일궈야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8일 기재부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인 양 의원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술유출 우려 등을 거론하며 상법 개정안의 '감사 분리선임제'와 '3%룰'에 대한 보완입법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8일 기재부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인 양 의원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술유출 우려 등을 거론하며 상법 개정안의 '감사 분리선임제'와 '3%룰'에 대한 보완입법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정부ㆍ여당이 재벌개혁 차원에서 정기국회 처리를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의 ‘감사위원 분리선임제’와 ‘3%룰’을 둘러싸고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공정경제 3법’ 추진을 주도하고 있는 여당 최고위원회의에서조차 기업들의 현실적 우려를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과, 공연히 기업 편 들지 말라는 주장이 정면 격돌하는 풍경이 노출된 것이다.

양향자 의원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상무까지 역임한 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영입된 반도체 전문가다. 그는 지난 16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 기업이 3%룰에 묶이는 상황을 틈타 소수지분을 확보한 외국 투기펀드 등이 자기 측 감사를 선임해 첨단기술을 해외로 유출시킬 우려가 충분하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재계의 호소를 신중히 감안해 법안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금융노조 위원장 출신인 박홍배 최고위원이 나섰다. 곧바로 마이크를 넘겨 받은 그는 “‘공정 3법’ 처리를 둘러싼 억지에 깊이 우려한다”며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우리 기업 기밀이 유출된다는 과장된 선동을 접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우리 기업에 대한 외국 기업 등의 기술탈취 사례를 감안할 때, 양 의원 주장을 ‘공연한 선동’으로 일축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주요 제조업 분야에서 우리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면서 해외 경쟁기업의 국내 기술탈취 시도는 일상화 했다. 양 의원은 그날 하이디스 인수 후 4,000건이 넘는 LCD 첨단기술만 빼간 뒤 ‘먹튀’해 국내 LCD 산업을 단숨에 제친 중국 BOE의 사례를 들었지만, 사건은 그 뿐만 아니다. 산업부에 따르면 최근 6년 간 산업기술 해외유출 사건은 적발된 것만 121건이었고, 그 중 ‘국가핵심기술’만도 29건에 달했다. 최근에도 반도체 인력 빼가기나, 자율주행차량 핵심기술 유출사건 등 중국 기업들의 ‘기술탈취’ 사건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외국 기업의 국내 기술탈취 사례와 통계를 새삼 거론하는 건 노동계 출신 여당 최고위원 주장의 비현실성을 공박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밖으로는 기술탈취를 우려하면서도, 정작 안에서는 협력 중소기업들의 기술과 자산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일부 우리 대기업들의 일그러진 민낯을 직시할 필요 때문이다. 이번 국감에서도 대기업의 ‘기술약탈’ 문제는 단골메뉴로 제기됐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스마트폰 액정보호필름을 기포 없이 쉽고 완벽하게 부착하는 협력 중소기업의 특허기술을 빼돌려 다른 업체에 제공해 싼 값의 카피 제품을 납품 받은 삼성전자 문제를 질타했다. 삼성전자 측은 “해당 업체의 롤러 등을 카피업체에 제공한 적은 있다”면서도 기술탈취는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삼성으로서는 막강 변호인단을 꾸려 소송에서 붙어보자는 얘기겠지만, 해당 중소기업은 피눈물 뿌리며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삼성뿐 아니다. 현대로템은 썬에어로시스라는 협력업체가 개발한 군 전술훈련 소프트웨어를 가로채 방위사업청에 납품한 혐의를 받은 수년 전 사건을 아직 해결하지 못해 국감장에서 질타를 받았다. 하이트진로는 유사제품 덤핑과 대리점 흡수 등의 방법으로 지방 소기업인 마메든샘물을 고사시키려던 2005년 사건과 관련, 공정위로부터 사업방해 시정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명령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내고 민형사소송을 제기하며 시간을 끄는 등 ‘갑질’을 이어가고 있다는 추궁을 받았다.

이해가 난마처럼 얽히는 비즈니스 현장의 사건들을 섣불리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대기업의 부끄러운 야만적 갑질이 계속 불거지는 한, ‘공정 3법’에 대한 재계의 호소도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들은 국내에서만이라도 위상에 걸맞은 상생 비즈니스를 하루빨리 정착시켜야 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대체텍스트
장인철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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