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에서 핀 창작예술촌, 까까머리 추억의 청수골 골목길...

입력
2020.10.16 04:30
<28>전남 순천 문화의 거리
순천부읍성 옛 경관 사라진 곳에
주민들 직접 참여 '도시재생 1번지'
110여개 예술인 작업실ㆍ공방 즐비
한옥글방ㆍ창작 예술촌 등 볼거리
청년 핫플레이스 옥리단길도 필견
공마당 둘레길서 '순천만' 한눈에

순천 문화의 거리 입구에 설치된 상징물

'정원 도시', '생태 관광도시' 등 때 묻지 않은 자연으로 잘 알려진 전남 순천. 그러나 이곳이 과거 군사, 행정,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1430년, 세종 때 축조됐다 지금은 사라진, 순천부읍성 터를 중심으로 꾸려진 '순천 문화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순천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유산, 근대 문화재, 현대 예술이 한데 뒤섞여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곳이다.

문화의 거리는 순천부읍성 서편에 있다. 남쪽으로 옥천, 북쪽으로 매산등, 동편에 중앙동 상가지역이 있다. 지금은 서문안내소를 경계로 '성안'과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을 '성밖'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통 읍성의 경관은 일제 강점기 때 완전히 사라졌고 그 터에서 발견된 몇몇 읍성 유구들만 볼 수 있다.

순천 문화의 거리 안내도


순천 문화의 거리 은행나무 숲길 양쪽으로 개성 있는 공방과 카페가 즐비하다.


순천부읍성 성곽터에 지은 서문안내소

순천 문화의 거리에는 순천부읍성 터와 향교, 서원 등이 있어 순천의 옛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주변으로 들어선 청년 점포들, 그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생긴 옥리단길, 순천의 달동네였던 청수골달빛마을, 기독교박물관도 빼놓지 말아야 할 곳들이다.

이 외에도 김혜순 한복공방, 조강훈 아트스튜디오, 장안창작마당, 한옥글방 등 창작예술촌 거점시설과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선비문화체험관, 청소년수련관, 생활문화센터 영동1번지, 영상미디어센터 두드림, 110여개의 예술인 작업실과 공방이 즐비해 무료할 틈이 없다.


골목길 따라 문화ㆍ예술 향기 가득

오래된 한정식집을 개조해 조성한 작은도서관 한옥글방


문화의 거리에 아기자기한 공방이 줄지어 있다.


옛 중앙파출소를 개조한 창작예술촌 '조강훈 아트스튜디오'

지난 11일 주말 오후 찾은 순천 문화의 거리. 초입으로 들자 이곳의 상징인 은행나무 숲길이 맞는다. 문화의 거리는 중앙로에서 금곡동 사거리까지 약 400m 구간이다. 이 길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소년수련관을 만난다.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행사로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바로 위에는 한옥으로 지은 작은도서관 한옥글방이 있다. 오래된 한정식집을 개조했다고 한다. 도서관 규모는 크지 않지만 3,000여권의 책이 비치돼 있다.

뒷골목으로 발길을 돌리면 정원도시답게 자투리땅을 활용해 가꾼 '한 평 정원'과 개성 만점들의 카페,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양지쌈밥과 인사동, 원조동경낙지 등 동네 맛집과 프랑스 가정식집 '르코앙', 한옥으로 된 이탈리아 코스요리 전문점 '리노', 초밥 전문 '희락' 등 맛집들은 외지에도 꽤 알려진 곳들이다.


식당을 리모델링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장안창작마당


순천 문화의 거리 뒷골목에 설치된 '한 평 정원'


고려 성종 때 세워진 순천향교

창작예술촌은 방치됐던 낡은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옛 파출소 건물을 고쳐 만든 조강훈 아트스튜디오, 길 건너편 김혜순 한복공방, 원도심 대표 복합문화예술공간인 장안창작마당에서는 작가들의 작품 감상과 문화체험이 가능하다. 거리 중간엔 순천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서문안내소가 있다. 성곽 모양을 따 곡선형으로 지은 독특한 건물이다. 700년 역사를 지닌 순천부읍성의 옛 성곽을 재현한 곳이다.

안내소 위로 올라서면 한옥과 오래된 낡은 주택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서문 터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고려 성종 때 세워진 순천향교와 조선 무오사화 때 희생된 김굉필 선생을 추모하는 옥천서원이 있다. 광주에서 온 김모(28)씨는 "골목 사이사이에 문화ㆍ예술과 순천의 역사까지 한눈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10년 기독교 역사이야기 '매산등'

700년 역사를 간직한 순천부읍성 서문터


1925년 건축된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2012년 개관한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서문안내소 옆에는 도심 물길과 함께 순천의 역사변천과정을 판석을 통해 한눈에 보는 서문터정원이 조성돼 있다. 순천부읍성 성돌 유구가 전시돼 있고 순천을 상징하는 삼산과 이수 조형물이 있다. 길 따라 100m가량 위쪽으로 걸으면 근대 기독교 관련 시설이 많다. 매산등은 110여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정착한 언덕이다.

거리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천사의 가방'은 선교사들이 당시 들고 온 철재가방을 재해석해 제작됐다. 1925년에 건축된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은 구한말부터 기독교 선교현장을 담은 사진과 선교자료가 있다. 2012년 문을 연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은 한국 기독교 복음의 역사와 근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금곡에코지오마을 골목길 모습


서정미 대표가 운영하는 공예창작소에서 아이들이 공방체험을 하고 있다.


순천 문화의 거리에 조성된 체험학습장 '다담'

문화의 거리 일대는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거듭난 거리다. 그전에는 좁은 골목, 작은 주택들 다닥다닥 늘어선 거리였다. 주변 각지에서 온 학생들의 하숙집, 자취방 등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후화한 환경 탓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거리로 전락했던 곳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모여 숨은 이야깃거리를 찾아내고 직접 마을을 설계하면서 변신했다. '도시재생 1번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지난해 10월 이곳에서는 '도시재생한마당' 행사가 성황리에 열리기도 했는데 기초자치단체가 이런 행사를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김홍두 순천시 재생기획팀장은 "주민들이 아이디어를 내 직접 실험하고, 단순한 주거환경 정비가 아닌, 과거의 가치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데 집중했다"며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한데 담아 낸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옥리단길엔 예술인 공방ㆍ카페 즐비

시민과 방문객들이 즐겨 찾는 옥리단길을 가로지르는 옥천


거리 곳곳에 개성 넘치는 카페들이 들어선 순천 문화의 거리


옥리단길에 창업한 카페 '랑께'

옥천(玉川)을 중심으로 생긴 '옥리단길'은 젊은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공방, 카페, 공연장, 음식점 등이 하나둘씩 늘고 있는 곳이다. 폐가를 개조해 만든 예술인들의 작업장, 극단풍화, 공예창작소, 시간여행 등이 눈길을 끈다. 도시재생 사업 후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옥천변 양쪽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꽤 들어섰다. 2018년 한 청년이 골목 안에 고깃집을 창업한 후 문을 여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유럽 가정식 레스토랑 '팡파르'는 핫플레이스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정도다. 버려진 한옥을 복고풍 감성으로 개조해 젊은이들 사이 인기가 높다. 일본식 호이테라면, 랑께ㆍ짙은ㆍ로만티코ㆍ멜터웨이즈 등 카페와 독립서점인 골목책방도 근처에 있다.


80~100년이 넘는 주택 3동을 합쳐 하나의 구조를 이룬 '시간여행'


'시간여행' 내부에는 주인이 수집한 개인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순천 문화의 거리 뒷골목 건물에 그려진 벽화

옥리단길과 문화의 거리 중간쯤 위치한 미술관, '시간여행'은 오래된 주택 3개 동을 합쳐 만들었다. 1동(갤러리 단구)은 1917년, 2동(외갓집 민박)은 1926년, 3동(단구)은 1937년에 지어졌다. 지금은 작은 미술관 외에도 체험민박집으로도 운영 중이다.

집주인이자 문화재생연구가인 김정진(69)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잊혀진 거리였다"며 "골목마다 쓰레기와 범죄 발생이 증가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번져 골머리를 앓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시재생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외지 방문객은 물론 벤치마킹을 위한 전국 지자체들의 방문이 눈에 띄게 늘었다. 현재 옥리단길에는 40여개의 카페와 맛집이 성업 중이다.


생기 도는 공간, 되살아난 청수골

문화의 거리 끝지점에 위치한 청수골달빛마을 입구


청수골달빛마을 골목에 그려진 벽화


청수골 입구 담벼락에 마을 유래가 설명돼 있다.

문화의 거리 끝 지점에 이르면 난봉산 자락 언덕에 자리 잡은 금곡동 청수골 마을이 나온다. 입구부터 마을 특징을 살린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수 있는 좁은 골목엔 주택들이 다닥다닥 연결돼 있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집 내부까지 훤히 보인다. 주민들의 소소하고 진솔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느리게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후 전망대에 올라 만나는 탁 트인 시내 풍경은 덤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꼭 들러야 할 '청수정(淸水井)'이 있다. 주민 협동조합에서 한옥을 개조해 만든 마을 카페와 식당이다. '어머니 밥상'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던 곳이다. 공동텃밭에서 재배한 채소와 지역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자연밥상 때문에 유명해졌다. 코로나19 여파로 운영을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2018년 복원한 전남 동부지역 최초 근대병원인 순천 안력산병원 격리병동


청수골 주민들이 만든 마을 식당 '청수정'


청수골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 중인 카페 '청수정'

청수골은 수년 전만 해도 순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주민 90% 이상이 60대 이상 노인들이었다. 장기간 방치된 집과 골목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 악취가 끊이지 않았다. 순천시와 주민들이 함께 노력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주민들이 만든 공마당둘레길에서는 멀리 순천만까지 조망할 수 있다. 2년 전 복원한 전남 동부지역 최초 근대병원인 순천 안력산병원 격리병동은 주민들의 건강 생활 쉼터다.

청수골 마을주민 이모(67)씨는 "처음엔 주민들의 생각이 서로 달라 마을 환경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지금은 원도심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곳으로 바뀌어 집을 매입하고 싶다거나 마을로 들어오려는 외부인이 줄을 설 정도"라고 말했다.

순천=글ㆍ사진 하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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