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이 버스킹을 한다면

입력
2020.10.13 22:00
27면
‘가왕’ 조용필이 2018년 5월 12일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50주년 기념 투어 ‘땡스 투 유’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티켓 값은 5만~15만 원이었고 10분 만에 동이 났다.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제공

‘가왕’ 조용필이 2018년 5월 12일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50주년 기념 투어 ‘땡스 투 유’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티켓 값은 5만~15만 원이었고 10분 만에 동이 났다.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제공


이런 상상을 해본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상상이라 욕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니까.

꼭 추석 연휴 기간 최고의 화제였던 나훈아의 공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그전부터 레전드급 슈퍼스타의 공연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런 상상이다. 바람 불어 좋은 어느 가을날, 시골 장터를 지나다 귀에 익숙한 가수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그가 이런 시골 장마당에서 버스킹을? 조용팔이나 주용필이겠지. 아, 그런데 맞다. 진짜 원조 조용필이 기타 하나 들고 밴드 없이 혼자 ‘고추잠자리’를 부르고 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못 믿겠다는 듯 감격한 표정이다.

“저 조용필 오빠 맞아요.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고요. 제가 노래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죠? 제 콘서트가 좀 비싸고 예매하기도 힘들거든요. 오늘은 공짜예요. 마음껏 같이 노래 불러요. 신청곡도 받아줄게요.”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한 시간 남짓 노래하더니 일일이 포옹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고 인증샷을 찍어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특종감을 제보받은 방송사 차가 보이자 그는 “오늘 저도 행복했습니다”라며 홀연히 차를 몰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후 방방곡곡 어느 작은 역 광장에서, 섬마을에서, 병원 중환자 병동에서, 호스피스 시설에서, 시골 노래자랑 게스트로, 작은 클럽에서, 심지어 80이 넘은 그를 우연히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일체의 스타디움, 실내체육관, 예술의전당 송년공연을 중단했다.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안 됐다. 가끔 삼성 임원 파티에서 3,000만원 받고 두세 곡 불러주거나 노래방 저작권료만으로도 충분히 잘 먹고 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도 ‘2020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 시청률 29%에 일조했다. 출연료 한 푼 안 받고 코로나에 지친 국민에게 힘내라며 혼신의 열정을 다 풀어놓은 73세 레전드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과연 콘서트 제목처럼 대한민국이 어게인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슈퍼스타는 15년 만에 방송에 나타나 자신은 신비주의가 아니었다면서 경상도 사나이다운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뉴스의 총아가 됐다. 본인의 의중과 무관하게 정쟁의 어게인 도구로도 쓰였지만, 한순간에 국민적 영웅 위치에, 소크라테스 형제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진위를 알 수 없는 미담이 쏟아졌다.

배와 기차가 등장하고 합창단과 댄서와 최고의 악단이 받쳐주는 이 화려한 연출을 보면서 나는 유감스럽게도 내 영혼이 위로받고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는 기분은 별로 들지 못했다. 그냥 좀처럼 보기 힘든 멋진 쇼 한 편을 본 느낌이었다. 전자장치가 난무하는 공연은 트롯의 정서와도 다소 동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의 공연을 디스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들 미치게 좋았다는데 내가 뭐라고 중뿔나게 평할 소양도 없다. 그냥 이런 슈퍼스타가 있으면 저런 슈퍼스타도 있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국민가수는 국민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그를, 그의 노래를 사랑해도 그들은 사실 너무 멀리 있다. 길가에 떠도는 외롭고 고단한 한 명의 영혼을 노래로 구할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가수로서의 소명을 다 한 것이 아닐까. 나훈아씨에게도, 조용필씨에게도, 그의 팬들에게도 혼날 각오가 돼 있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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