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쇼 피로증

입력
2020.10.09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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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완치되지 않은 채 퇴원한 5일 백악관 블루룸의 트루먼발코니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코로나19에 감염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완치되지 않은 채 퇴원한 5일 백악관 블루룸의 트루먼발코니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중에 맞은 비자발적 ‘집콕’ 추석 연휴. 자연스럽게 TV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채널을 돌려 봐도 실제 현실을 보여 준다는 의미의 대세 예능 프로그램인 '리얼리티 쇼'가 넘쳐났다. 빼어난 미모의 여배우는 잠옷 바람으로 간편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며 온몸으로 "나는 털털한 성격의 반전 매력까지 갖췄다"고 외쳤다. 또 다른 채널에선 신혼 생활 중인 여배우가 수준급 요리 실력을 뽐내며 현모양처의 판타지를 구현했다. 맛깔스러운 요리를 뚝딱 완성하고는 꽃장식을 더한 완벽한 플레이팅까지 선보였다. 진짜 일상이 아닌 진짜 같은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게 리얼리티 쇼임을 새삼 깨달았다.

긴 연휴를 마치고 돌아온 일터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준비한 새 시즌의 리얼리티 쇼가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진 발표부터 단 사흘 만에 입원ㆍ치료ㆍ퇴원까지 마치는 극적인 '조기 퇴원 쇼'였다. 2004년부터 NBC방송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에 출연하며 얻은 인지도를 발판 삼아 대통령까지 된 그는 꾸준히 논쟁을 부르는 대중영합주의적인 정치 쇼를 연출해 왔다. 지난달 말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와 이전투구 양상을 보인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에게 TV토론 상대와의 대화 전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청자가 자신을 더 재미있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으로 믿게 만드는 게 먼저다. 상대방의 2분 답변을 기다려 주는 토론 규칙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21만명을 넘어선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연출한 '발코니 리얼리티 쇼'에 대한 국민적 공분은 임계치를 넘어섰다. 그는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퇴원해 백악관에 돌아온 직후 블루룸의 트루먼발코니에 나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버렸다. 트위터 영상 메시지로는 "코로나19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경시했다. 정작 메릴랜드주(州) 월터 리드 군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밝혔다는 그다. 한 미국 기자는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감염으로 지난 4월 사망한 친구 스탠 체라처럼 자신도 죽는 것인지 측근들에게 계속 물었다"고 전했다. 그는 두려움의 진짜 감정은 숨긴 채 지지자들이 열망하는 '강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이 끝나면 이 지겨운 리얼리티 쇼를 그만 보게 될까. 사실 끊임없는 거짓말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전략은 리얼리티 쇼의 장르적 특징과 많이 닮아 있다.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이 넘치다 보니 현실의 핍진한 재현은 시청자로부터 외면 받고 자극적인 상황극만 시청률 왕좌에 오른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리얼리티 쇼에 푹 빠져 있던 그 문화적 토대 위에 '돌연변이 대통령' 트럼프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이대로라면 그가 재선에 실패해도 미국 아닌 그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트럼프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코로나 블루(우울증)' 시대에 TV에서만이라도 뻔한 리얼리티 쇼보다는 좀 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더 많이 접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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