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 못한 해괴한 금리정책

입력
2020.10.05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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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대출 줄인다며 줄줄이 금리인상
제자리 조달금리 불구 심한 ‘부당거래’
서민 ‘삥’ 뜯어 은행만 배불리는 실책

최근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정책이 가동되면서 각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줄줄이 인상하는 바람에 불가피한 금융소비자들의 애꿎은 피해가 우려된다. 사진은 시내 한 은행의 대출창구 모습. 연합뉴스

최근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정책이 가동되면서 각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줄줄이 인상하는 바람에 불가피한 금융소비자들의 애꿎은 피해가 우려된다. 사진은 시내 한 은행의 대출창구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희한한 표현을 썼는데, 요즘엔 그게 현 정권의 실정을 반어법으로 야유하는데 자주 쓰인다. 정권의 무능과 오만, 비(非)상식으로 인한 국정 난맥이 성과에 비해 훨씬 두드러져 보이는 상황과 무관치 않은 세태일 것이다. 나는 정부가 최근 은행 대출금리 인상을 얼렁뚱땅 부추긴 것도, 참으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해괴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사상 초유의 저금리 상황에서 거꾸로 은행 대출금리가 줄줄이 오르게 된 경위는 이렇다. 저금리로 풍부해진 시중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유입돼 시장이 과열되고 투기가 만연하게 된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자 정부는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을 강력 규제했다. ‘투기와의 전쟁’ 차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은행들은 대출 억제용이라며 최근 한 달 새 주담대 금리를 0.1~0.3%포인트 올려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신용대출이 폭증했다.

‘풍선효과’였다. 지난 5월 114조7,000억원이던 5대 시중은행 개인 신용대출 총액은 지난 6월부터 매월 14% 내외 급증세를 이어 갔다. 사상 최대 월 증가폭을 기록한 8월엔 124조3,000억원에 이르렀다. 불과 3개월 새 10조원 가까이 폭증했다. 내용 면에서도 유의해야 할 현상이 포착됐다. 지난해 2030 세대 신용대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9.1%였다. 반면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증가율은 지난해의 5배인 44.7%에 달했다. 청년들이 신용대출 폭증세를 주도하며 ‘영끌’로 부동산과 주식에 ‘빚투’한 흔적이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유동성 관리도 관리지만, 소득과 재산이 적은 청년층이 ‘빚투’에서 실패할 경우, 대출 부실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정부는 은행들에 신용대출도 줄이라고 다급히 지시했다. 대출총액을 줄이는 총량관리 방식이 거론됐지만, 뒤로는 대출금리 인상까지 허용했다. 그 결과 각 은행들은 추석 전 대부분 신용대출 우대금리를 삭감하는 한편, 금리도 0.1~0.2%포인트씩 일제히 인상했다.

원래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올린다. 그러면 은행의 자금조달 금리도 상승하고, 그에 맞춰 대출금리도 올라가 자연스럽게 대출 억제 효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불황에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친 현 상황에서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긴 어렵다. 따라서 대출조건 강화나, 은행별 대출한도를 정해 규제하는 미시 조치까지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걸 넘어 조달금리가 제자리인데도 대출 억제를 명분으로 은행들이 멋대로 금리를 올리는 건 부당하며, 정부가 그걸 부추기거나 방조한 건 분명 잘못된 정책이다.

은행 가계 대출금리를 평균 2%로 치자. 정부 정책에 따라 10조원의 대출 시장을 포기하면 은행으로서는 연간 2,000억원의 이자 수익을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게 은행 경영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면 정책적 보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KB금융그룹만 해도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반기 순익이 전년과 비슷한 1조7,000억원 이상을 기록하는 등 은행들만은 여전히 ‘등 따습고 배 부른’ 상태다. 게다가 은행들은 규제 전 ‘대출붐’을 타고 이미 적잖은 이자 수익을 누려온 처지다.

따라서 은행들은 공공재로서 이번만큼은 대출 억제에 따른 이자 수익 감소를 스스로 감당하는 게 옳고, 정부도 그렇게 유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대출금리 인상을 방조하고 심지어 부추김으로써, 극심한 불황 속에서 신용대출에라도 기대야 하는 수십, 수백만 소상공ㆍ자영업자들로부터 추가로 ‘삥’을 뜯어 은행의 배를 채워 주는 얼빠진 선택을 한 셈이 됐다. 참으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해괴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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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철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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