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도서정가제 '개악'입니다”

입력
2020.09.27 14:20
수정
2020.09.27 15: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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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 폐업 이어져 ... 출판계 "도정제 사수"

서울 종로구 혜화동 책방이음 문 앞에 붙은 폐점 공고. 책방이음 제공.

서울 종로구 혜화동 책방이음 문 앞에 붙은 폐점 공고. 책방이음 제공.


“책을 사랑한 죄로, 나의 수고료도 포기하며 운영해왔습니다. 도서정가제 덕에 겨우 운영비는 나오겠다는 희망으로 버텨왔는데, 도정제까지 개악된다면 문 닫을 수밖에 없겠죠.”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책방넷)가 올 들어 4차례 실시한 ‘코로나19 이후 동네책방 피해 현황’ 실태조사에서 터져 나온 절규다. 코로나19 사태, 도서정가제 ‘개악’ 충격파까지. 악재가 겹친 출판 서점업계의 시름이 깊다.


"수익 제로" 폐점 속출… 벼랑 끝에 내몰린 동네서점

지난 23일엔 서울 대학로 ‘책방이음’이 ‘폐점’을 선언했다. 2009년 12월 문 연 이 서점은 동네책방계의 맏형 격이어서 충격이 크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책을 팔 수도, 공간 대여나 강의도 할 수 없으니 임대료 낼 돈이 없더라고요. 3월에 1,600만원 대출 받은 거 다 쓰고 나니 더는 버텨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조진석 대표의 말이다. 책방넷 사무국장이기도 한 조 대표는 동네책방 실태조사 결과를 정부에 전달하고 지원책을 촉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동네서점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책방넷 조사 결과, 동네서점 61곳 중 19곳에서 전년 대비(올 1~3월) 매출이 41~60% 하락했고, 61% 이상 줄었다는 곳도 24곳에 달했다. 올 상반기에만 서울 망원동의 ‘한강문고’, 성산동의 ‘그렇게 책이 된다’ 등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폐점해야 하는데 폐점 비용이 없어 버티고 있다"는 곳도 적지 않다.

이들 위로 날아든 건 도서정가제 ‘개악’ 소식이다. 출혈경쟁을 막기 위해 책값 할인을 정가의 15% 이내로 제한한 도서정가제는 3년마다 재검토하게 돼 있다. 11월 재검토 시점을 앞두고 문체부와 출판계가 손쉽게 합의안을 내는가 했는데, 문체부가 돌연 원점 재검토를 선언하며 상황이 꼬였다. 문체부는 현행보다 완화된 도정제 안을 내놨고, 출판계는 '도정제 사수’를 내걸고 맞서고 있다.


24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36개 단체가 모인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서정가제를 후퇴시키는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스1

24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36개 단체가 모인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서정가제를 후퇴시키는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스1


"문체부가 도서정가제 형해화… 자본 논리에 휘둘려"

논란이 커지자 문체부는 이달 초 새로운 안을 내놨다. △3년이 지났고 1년간 판매되지 않은 장기 재고 도서의 도정제 적용 제외 △문체부가 주최하거나 예산 지원하는 도서전에 한해 도정제 적용 제외 △전자책 할인율 15%→20%로 확대 △연재 중인 웹툰, 웹소설은 완결 전까지 도정제 적용 유예 등이 골자다.

출판서점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할인을 자꾸 허용해주면 자본력 갖춘 온라인서점의 할인공세에 동네서점은 버텨 낼 재간이 없어서다. 그래서 문체부 제안을 '할인율 자체는 건드리진 않되 조금씩 구멍을 내서 사실상 형해화하는 수순'이라 보고 있다.

발행된 지 3년 지난 악성 재고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이미 이런 책들은 '재정가제도'를 통해 새 가격이 책정되고 있다. 박옥균 1인출판협동조합 이사장은 “결국 문체부의 안은 웹소설 웹툰을 장악한 대형 플랫폼 네이버와 카카오 비위 맞춰주려는 것”이라며 “문체부가 문화 다양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8월 서울 광화문 한 대형서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연합뉴스

8월 서울 광화문 한 대형서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연합뉴스


도종환 위원장 “도정제 지켜주겠다”... 공은 문체부로

도정제 개정 논란은 결국 국회로 갈 수밖에 없다. 최근 출판계 인사들은 문체부 장관 출신인 도종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을 찾아가 도서정가제 취지를 훼손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도 위원장 본인이 2014년 도정제 강화 법안을 통과시킬 때도 교문위에서 큰 역할을 했다. 도서정가제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곽미순 집행위원장은 “도 위원장이 도정제 개정안이 만들어진 지 6년밖에 안 돼 정착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니 문체부를 설득해보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특히 3년마다 도정제를 재검토하도록 한 ‘출판문화산업진흥법’ 27조 2항에서 ‘폐지, 완화 또는 유지’에 더해 ‘강화’를 추가하는 방안도 논의할 방침이다.

문체부는 당초 25일 도정제 안건을 규제개혁위원회에 올리겠다며 출판계의 참석을 독려했으나 출판계가 거부하자 일정을 추석 뒤로 연기한 상태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문체부가 도서정가제는 산업정책이 아니라 문화정책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세우는 게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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