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만 모르는 극장의 위기

입력
2020.09.26 1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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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멀티플렉스 CGV가 지난 3월 전국 직영점 35곳의 영업을 중단했을 당시 서울 중구 명동 CGV 영화관에 영업 중단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멀티플렉스 CGV가 지난 3월 전국 직영점 35곳의 영업을 중단했을 당시 서울 중구 명동 CGV 영화관에 영업 중단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국내에 책 ‘규칙 없음’이 번역 소개됐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넷플릭스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리드 헤이스팅스의 첫 저작이다. 2007년 OTT 사업을 시작해 수년 만에 세계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된 넷플릭스의 성공 비결을 엿볼 수 있다.

책에서 헤이스팅스는 자유와 책임을 앞세운다. 직원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헤이스팅스는 말단 직원이라도 고위 상급자에게 스스럼없이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업무 목표만 달성하면 직원 누구든 휴가를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위계를 뼈대로 한 국내 기업 문화를 떠올리며 읽다 보면 경영철학서 ‘규칙 없음’은 판타지소설처럼 느껴진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영화 산업은 악몽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특히 극장가 상황은 빙하기라 표현할 만하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테넷’ 덕분에 오랜 만에 활기를 띤 지난 8월 극장 매출은 772억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2,089억원)의 3분의1 수준이다. 8월 중순 시작된 코로나19 2차 유행으로 극장을 향한 발길은 다시 줄었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 CGV는 올해 적어도 2,500억원 적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멀티플렉스 체인 한 곳은 추석 연휴 이후 상당수 극장의 영업을 중단할 것이라는 풍문이 영화계를 떠돈다. 영화 제작사들은 흥행은커녕 제작비 회수도 힘드니 화제작들을 시장에 내놓지 못하고 있고, 눈길 끌 신상품이 없으니 극장에 손님이 몰리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몇몇 투자배급사들은 신규 작품 투자를 아예 중단한 상태다. 더 암울한 건 내년에도 시장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위기를 외치면서도 국내 극장들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지난 4월 개봉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트롤2)는 국내 주요 극장들의 경직된 사고와 폐쇄적인 문화를 명확히 드러냈다.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체인 중 메가박스만 이 영화를 상영했다. 대기업 계열 CGV와 롯데시네마는 ‘트롤2’가 IPTV 주문형비디오(VOD)에 동시 개봉한다는 이유로 상영을 거부했다. 코로나19로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 칸막이가 더 낮아진 상황을 고려치 않았다. 최신 화제작이 적다고 울상이면서도 극장의 상전 같은 태도는 딱히 바뀌지 않았다고 제작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유니버설이 ‘트롤2’를 극장 상영과 VOD로 동시 공개한다고 했을 때 미국 극장들은 크게 반발했다. 북미 2위 멀티플렉스 체인 AMC는 아예 “유니버설 영화를 앞으로 상영하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다시 상종조차 하지 않을 듯하던 유니버설과 AMC는 지난 7월 ‘최신 영화를 최소 3주 이상 상영하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깜짝 발표했다. 90일 이상 극장 상영이라는 오랜 규칙은 사라지게 됐다.

격변의 시기 게임의 규칙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극장→IPTV→OTT 등으로 이어지던 수익창출 구조는 무너졌다. 극장과 온라인이 혼재된 수익구조 형성이 불가피했다. ‘규칙 없음’을 주창하며 새로운 시장 규칙을 만들어가는 넷플릭스가 코로나19 시대에 더 각광 받는 이유다. 극장이 사라진다면 영화 마니아는 단지 슬픔에 젖겠지만 영화 산업 종사자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극장들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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