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도 콜드체인 벗어나면 안돼"…기본 무시한 유통업체

입력
2020.09.22 19:00
수정
2020.09.25 19: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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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냉장차에서 작은 냉장차로 백신 옮기며 상온 노출
신성약품 측 "길어도 5분"..."종이박스 배달" 증언도
전문가들 "아무리 짧은 시간 노출해도 업체 잘못"

22일 오전 광주 북구의 한 병원에서 북구보건소 직원들이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무료접종 연기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22일 오전 광주 북구의 한 병원에서 북구보건소 직원들이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무료접종 연기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백신은 생산부터 접종 직전까지 저온 유통체계(콜드체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정부와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조달 계약을 맺은 업체가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22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국가 무료 접종이 전면 중단됐다. 국내에서 백신 유통 문제로 예방접종이 중단된 경우는 처음이다.


"작은 냉장차로 옮길 때"... "시동 꺼 놔" 상온 노출

독감 무료 예방접종 사업을 담당하는 질병관리청은 이달 초 독감 백신 조달업체로 신성약품을 선정했다. 국내 8개, 해외 2개 백신 제조업체로부터 백신을 공급받아 전국의 병원, 보건소 등 의료기관에 유통ㆍ공급하는 일을 맡긴 것이다. 신성약품은 입찰에서 2순위 협상업체였으나 1순위 업체가 제약사들로부터 공급확인서를 받지 못하자 계약을 따냈다. 신성약품이 국가 백신 조달에 참여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정부와 계약한 물량은 1,259만 도즈(1도즈는 1회 접종분)로 약 1,006억원 수준이다.

하지만 신성약품은 백신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백신은 생물이 생산한 물질로 만든 약품을 뜻하는 ‘생물학적 제제’이기 때문에 영상 2~8도 사이의 저온에서 보관돼야 한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이날 국가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관련 브리핑을 열고 "(인플루엔자 백신을 싣고 있던) 냉장차에서 (백신을) 지역별로 재배분하는 과정에서 상온에 일부 노출됐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큰 냉장차에서 작은 냉장차로 백신을 나눠 싣는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신성약품 측도 상온 노출은 인정하지만 짧은 시간이었다는 입장이다. 신성약품의 한 임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배송 차량 기사가 휴게소에 들러 차 시동을 꺼놓고 잠시 자리를 비운 것 등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신성약품 측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온에 노출된 시간은 길어도 5분가량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의사 전용 회원제 커뮤니티인 ‘메디게이트’에는 “백신이 스티로폼 아이스박스가 아닌 종이상자에 넣어 배달됐다”는 의료기관 관계자들의 글도 올라오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한국건강관리협회 경기지부 앞에 "무료 국가 예방접종 잠점중단" 안내문이 붙어있다. 유료 독감 예방접종은 가능해 예방접종을 받으려는 시민들이 줄 서 있다. 뉴스1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한국건강관리협회 경기지부 앞에 "무료 국가 예방접종 잠점중단" 안내문이 붙어있다. 유료 독감 예방접종은 가능해 예방접종을 받으려는 시민들이 줄 서 있다. 뉴스1


"콜드체인이 가장 중요... 북한은 한 겨울에 접종"

신성약품의 주장처럼 5분 정도만 상온에 노출됐다면 백신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은 낮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일상적인 접종 때도 (5분 정도는) 상온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5분 동안 노출됐다면 백신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낮기는 하다”며 “실제로 어떻게 보관, 유통했는지는 정부 조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 5분이라도 냉장 상태를 유지하지 않은 것은 의약품 유통ㆍ공급업체로서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백신 보관 및 수송 관리 가이드라인’에서 백신의 생산부터 접종 직전까지 냉장 유통체계(콜드체인)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기모란 국립암센터대학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백신 유통과정에서 콜드체인은 굉장히 중요하고, 의약품 유통업체라면 당연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단 1분이라도 상온에 노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정부가 업체에 비용을 지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신 콜드체인 문제로 대규모 예방접종이 중단된 경우는 처음이지만, 저개발국가의 경우 예방 접종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기 교수는 “백신을 지원해줘도 별도의 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해 예방접종을 하지 못하는 국가들도 있다”며 “이런 곳에서는 백신 비용보다 콜드체인 유지 비용이 더 많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 교수는 “북한도 콜드체인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바깥 기온이 낮은 동절기에 ‘예방 접종의 날’을 정해 접종을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도 백신이 저온에서 유통, 보관되는지를 수시로 점검한다. 백신 유통 차량에는 온도계를 설치해 수송 온도를 모니터링하고, 의료기관이 별도의 백신 냉장고를 갖췄는지 적정온도인지를 점검하고 있다. 또 저온 보관 수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에는 백신을 폐기하도록 하고 있다. 최원석 교수는 “이렇게 대규모로 예방접종이 중단된 경우는 처음이지만 개별 의료기관에서 백신 냉장고 전원이 꺼져 접종을 멈춘 사례는 소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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