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제대로 건드린 태국 反정부 시위대... 충돌 초읽기

입력
2020.09.21 16:20
12면

왕실 개혁 시위대 핵심 요구 전환
경찰 "왕실모독 조사"... 처벌 예고

19일 태국 방콕 사남 루엉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19일 태국 방콕 사남 루엉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태국의 반(反)정부 시위대가 마침내 왕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2014년 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거리 시위에서 왕실 개혁을 공식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도 불가침 영역인 왕실에 대한 공격만큼은 수용할 수 없다며 강력한 법 집행을 예고해 태국 정국이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21일 방콕포스트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반정부 시위대는 주말인 19,20일 방콕 왕궁 인근 사남 루엉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집회 참가자가 10만명을 넘었다고 주장한 반면, 경찰은 “최대 2만명”이라고 일축했다.

문제는 집회에 등장한 시위대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군주제로는 결코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면서 왕실 개혁과 정권 퇴진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광장에 “이 나라는 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금속판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1932년 무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 바닥에 설치된 ‘민주화 혁명 기념판’이 2017년 4월 갑자기 사라진 것을 항의하는 취지다. 그러나 금속판은 이날 오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다시 제거됐다.

시위대는 왕실 자문기관인 추밀원을 향해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경찰이 참가자들을 막아서면서 물리적 충돌도 우려됐으나, 시위대의 왕실개혁안을 경찰이 전달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져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위대는 24일에도 의회 해산과 개헌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또 내달 14일에는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지지자들에게 총파업을 제안했다.

19일 태국 반정부 시위에 참석한 한 시민이 방콕 사남 루엉 광장에 "이 나라는 국민의 것"이라는 내용이 쓰여진 금속판을 설치하고 있다. 방콕=AP 연합뉴스

19일 태국 반정부 시위에 참석한 한 시민이 방콕 사남 루엉 광장에 "이 나라는 국민의 것"이라는 내용이 쓰여진 금속판을 설치하고 있다. 방콕=AP 연합뉴스

시위대를 달래던 모습과 달리 태국 경찰은 집회가 끝나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였다. 당장 삐야 따위차이 방콕 경찰청 차장은 “시위대 핵심 인물들을 최소 3가지 혐의로 기소할 수 있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방콕시 소유인 광장에 금속판을 허가없이 설치한 것과 시위 과정에서 일부 기물들이 파손된 책임을 이들에게 묻겠다는 얘기이다. 이어 경찰은 “시위대 연사 40여명의 왕실모독죄 관련 혐의를 찾기 위해 녹음된 발언 내용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간 구두 경고로 그쳤던 왕실모독죄 적용 및 처벌이 가시권에 들어간 것이다. 전날 집회 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면 시위대가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고 날을 세웠던 쁘라윳 짠오차 총리 역시 강력한 사법처리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일 혐의 만으로 최대 15년 징역형 선고가 가능한 왕실모독죄가 수면 위로 오르자 야권은 일제히 반발했다. 짜뚜뽄 뽐빤 반독재민주연합전선(UDD) 회장은 “정권이 시위자들에게 보복성 법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시위에 끌어들이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