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정치자산을 잃으면

입력
2020.09.17 17:33
수정
2020.09.17 17:5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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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文정부에 기대는 실용보다 가치에
연이은 불공정 파문으로 정치자산 소진
정권 맡긴 시대적 요구 다시 상기해보길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7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7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매 정권의 키워드가 있다. 출범 때 야심차게 선언하는 정체성이자 국민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하고 기대하는 국가운영의 대표원칙이다. 거창하게는 당대 다수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시대가치다.

이명박정부에서는 단연 ‘경제’였다, 도덕성 따위는 제쳐두고 유권자들은 “경제대통령” 호언에 몰표를 던졌다. IMF 이후의 긴 침체에 지쳐 산업화시대의 역동성을 기대했다. 결국 갖은 부패와 비리로 퇴임 후 단죄됐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비교적 괜찮은 경제지표를 만들어 낸 것만은 그럭저럭 인정할 만했다.

박근혜정부에선 ‘행복’이었다. 낡아 버린 박정희 추억의 마지막 재활용 정서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으로 만든 터라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바뀐 시대정신은 결국 퇴행으로 질주하는 그를 임기만료까지 놓아두지 않았다. 행복을 키워드로 삼은 정권에서 정작 많은 국민이 행복해했을 때가 그가 권좌에서 내려오던 순간이었다는 건 지독한 아이러니다.

촛불의 요구는 특권도 차별도 없는 세상이었다. 예전 산업화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거대한 국가프레임의 변화였다면, 이제 개별적 삶의 질 보장을 요구하는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 갈수록 좁아지는 기회의 문 앞에서 다른 이의 특권은 곧 나의 부당한 손해라는 각성이 일반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문재인정부의 대의가 ‘평등 공정 정의’(셋은 사실 동의어다)임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정의는 노무현정부의 선행 키워드였다. 그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 정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정사회의 기틀을 잡거나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보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대는 너무 빨리 무너졌다.

이 정부의 이념 지향을 잘 아는 터에 경제 안보 외교 등 구체적인 국정 실적에는 애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평등공정의 실현이 기대의 본질이었다. 말하자면 문 정부의 정치적 자산은 실용자산이 아닌 가치자산이었다. 이 정부에 관한한 무능은 용서가 돼도 불공정은 용서받기 어려운 까닭이다. 권력형 비리보다 훨씬 사소한 자녀특혜 여부 문제가 번번이 더 커지는 상황도 이 때문이다.

잠깐 곁길로 돌자면 징병제의 순기능은 완벽한 평등 체험이다. 동시대 젊은이 간에 출신·학벌·재산·직업 등 모든 사회적 조건이 무화(無化)하는 단 한 번의 인생 경험이다. 갈등과 반목이 유난한 한국사회에서 이 공평한 경험이 일정 부분 공동체 인식의 접착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고작 2~3년 군대기억을 평생 즐거이 되뇌는 특이 문화에서 병역 불평등은 아무리 가벼워도 용납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정권과 지지자들이 전·현 법무부 장관을 결사옹위하는 건 검찰개혁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개혁 또한 본질은 공정 실현의 수단이다. 자의적 차별적으로 행사돼 온 검찰권을 축소 분산함으로써 특권과 불공정 소지를 없애자는 게 취지다. 나란히 공정성 시비에 말림으로써 그 둘을 앞세운 검찰개혁마저 완연히 희화화됐다.

연이은 불공정 파동으로 이 정부는 거의 유일한 정치자산을 다 잃었다. 남은 선택은 둘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최대한 자산손실 복구에 나서든지, 아니면 극렬지지층에 기대 관성(慣性) 행보를 계속하는 길이다. 초심을 살려 불공정성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의지를 보인다면 나름의 정권가치를 웬만큼은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으면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또 다른 파당의 의미 없는 집권기로나 평가될 것이다. 노무현정신 계승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차기대선의 향방도 이 선택에 좌우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선택의 당사자는 물론 문 대통령이다.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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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한국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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