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작가의 투쟁

입력
2020.09.15 18:00
수정
2020.09.15 18:2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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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벨라루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난 9일 민스크 소재 자신의 집에 정체불명 사람들의 침입 시도가 있은 후 도움을 요청하자 달려 온 벨라루스 주재 해외 외교관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민스크= EPA 연합뉴스

벨라루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난 9일 민스크 소재 자신의 집에 정체불명 사람들의 침입 시도가 있은 후 도움을 요청하자 달려 온 벨라루스 주재 해외 외교관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민스크= EPA 연합뉴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1986년)는 소련(1922~1991)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 베트남전쟁이 치욕의 상징이었듯, 소련에 아프가니스탄은 불명예의 이름이었다. 별 소득 없는 10년 전쟁으로 소련군 1만5,000명가량이 전사했다. 체르노빌 사고는 경직된 소련 관료주의의 민낯을 드러낸 사례다. 방사능 피폭으로 최소 4,000명이 숨졌다.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전쟁과 체르노빌 사고의 참상을 감추고 싶어했다. 소련에 속했던 벨라루스의 언론인 출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2)는 소설 ‘아연 소년들’(1992)과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를 통해 무미건조한 숫자로만 남을 뻔 했던 끔찍한 역사를 기록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참전 소년병들의 부모나 병사, 원전 사고 관련자 등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목소리 소설’이라 불리는 알렉시예비치의 작업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성취를 공인 받았다.

□벨라루스가 지난 9일 실시된 대선 결과를 두고 정치적 혼돈에 빠져 있다. 야권과 국민 대다수는 1994년부터 철권 통치 중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부정 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재선거 요구를 위해 야권이 만든 위원회의 7인 위원 중 1명으로 반정부 활동 중이다. 그를 제외한 위원 6명은 강제 출국 당하거나 체포됐다. 독재정권조차도 알렉시예비치의 지명도 앞에 어찌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알렉시예비치의 초기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집필 완료 2년 뒤인 1985년 간신히 출간됐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소련 여성의 영웅적 면모보다 아픔과 고뇌에 주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연 소년들’ 역시 영웅적인 전쟁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재판을 거치는 곡절을 겪었다. 루카셴코의 최대 후원자는 소련의 옛 영광을 재현하고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소련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는 노벨상 작가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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