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가치, 밥 짓는 사람의 가치

입력
2020.09.13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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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에 삶아 밤새 불려 놓은 시래기 껍질을 벗겨 3~5㎝ 길이로 썰고, 마늘, 들기름, 간장 등으로 양념을 한 다음, 불려 놓은 쌀 위에 얹는다. 시래기 밥을 할 때는 밥물도 평소보다 3분의 1가량 적게 잡는다. 불린 시래기 자체에 수분이 있어 자칫 밥이 질어지기 때문이다. 밥을 안치고 나면 양념장을 준비한다. 청양고추 다져 넣은 부추 양념장은 시래기 밥뿐 아니라 곤드레, 콩나물, 가지 고지 등 어느 채소 밥에도 만능이다. 그밖에는 청국장 찌개를 끓이고 계란찜을 하고 잘 익은 열무김치를 내놓는다.

한국 사람의 밥상은 이렇듯 손이 많이 가기로 유명하다. 반찬이 부실하면 밥상을 걷어찼다는 옛 어른들도 있다지만 누군가를 위해 삼시 세끼 밥상 차리는 일 자체가 정신과 육체 에너지 모두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국수나 먹읍시다.” 철없는 남자들이 종종 이런 식으로 주문을 한다. 하지만 이 간단하기 짝이 없다는 국수 한 그릇만 해도, 멸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수제비, 메밀국수, 막국수, 짜장면, 짬뽕을 비롯해 무려 500가지 메뉴가 포진하고 그 하나하나에도 조리법이 500가지는 된다. 거기에 밥, 찌개, 국, 나물, 조림, 볶음 등등… 잘나가는 셰프야 몇 가지 음식만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어느 국회의원 말마따나, 집에서 밥이나 하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500배, 1,000배 많은 조리법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고 있다. 직장인은 재택을 하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면서 밥상을 책임진 사람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도 늘어나는 모양이다. 가족들이 출근하거나 등교하고 나면 자기만의 시간을 챙길 수 있었지만 이제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상황에 우리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차피 밥, 반찬을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그마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을까? 아무래도,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기가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신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지 않는가.

중년 남자가 밥상을 차린다는 이유로 이따금 강연을 나갈 때가 있다. 청중은 대개 중년 여성들인데, 결혼 후 평생 가족들의 밥상을 차렸건만 가족 구성원들이 무식한 부엌데기 취급을 할 때가 제일 서럽단다. 그럼 내가 더 흥분해서 이렇게 말해 준다. 가족 누구든 여러분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 밥상을 엎어버리고 다시는 밥을 주지 마세요!

수렵시대도 아니건만 여전히 부엌 일은 여성의 당연한 운명으로 치부되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 당연한 일이란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네가 할 일인데 뭐가 불만이냐고 나오면 상황은 크게 꼬이고 만다. 그나마 노력하는 남성들은 “아내를 도와” “아내 대신” 설거지라도 하는 모양이지만 부엌일이 애초에 누군가의 몫이라는 편견 자체를 버리지 않는 한 별 도움은 되지 못한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밥상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팬데믹 시대에 들면서 외식도 만만치 않고 허구한 날 배달이나 간편식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집밥의 가치도 그만큼 더 커졌다. 가족의 음식을 책임지는 당사자도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하지만 이제는 가족을 비롯해 사회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밥상 너머에도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그래야 사람이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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