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세바스티안에 기억을 묻은 내 친구

입력
2020.09.10 22:00
27면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라 콘차 해변.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라 콘차 해변. ⓒ게티이미지뱅크


따끔거릴 만큼 강렬한 햇살의 기운이 살짝 누그러지면,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스페인의 영화제 소식이 들려 온다. 우리에게는 베를린, 칸, 베니스 같은 세계 3대 영화제가 유명하지만, 스페인 최대 규모인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역시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꿈의 영화제로 꼽힌다. 해외에서도 감독 누구의 팬이라며 짧은 한국말로 말을 거는 사람을 심심찮게 만나는 시대이다 보니, 스페인의 영화제에서도 한국영화는 단골 초대손님이었다. 이렇게 한국영화가 진출할 때면 즐겨 통역을 담당하던 이가 스페인에 살던 나의 오랜 친구다. 우린 온 세상이 다 불만이던 중2병 시절의 단짝이었고, 보기 싫은 교과서 대신 외국영화 정보를 줄줄 외우며 몰래 영화관 다니는 걸로 소심한 반항을 하곤 했다.

이 년 전 걸려 온 전화도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가 한창인 현장에서였다. 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전 세계 스타들이 인터뷰를 즐겨 하는 장소, 그러다 보면 간혹 높은 파도가 카메라를 덮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하는 바로 그 다리였다. 영화제 건물이 뒷배경인 다리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초승달처럼 휘어진 해변이 오래된 도시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커다란 가리비조개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땅을 파고든 모양 그대로 ‘조개(라 콘차 La Concha)’라고 부르던 애칭이 해변의 이름이 되었는데, 그해 최고의 영화에 주어지는 조개 껍질 모양의 상패 역시 이 해변을 상징하는 것이다.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주리올라 다리.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주리올라 다리. ⓒ게티이미지뱅크


이 불황의 시기에도 애써 만든 우리나라 작품들이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니 참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없는 올해의 영화제 소식은 들을 때마다 가슴 저릿한 슬픔이다. 몇 개월 전 그녀는 우연히 찾아 온 지독한 병을 이기지 못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만나지 않아도 뻔히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되는 SNS 세상에서 우리는 늘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스페인어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카탈루냐어 표기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그녀는 급하게 떠난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의 정보를 물으며 열심히 메신저를 주고 받았지만, 정작 얼굴을 보는 건 다음으로 미뤄뒀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굳이 가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젊다고만 생각했다. 바르셀로나에 취재를 갔을 때도 딱 하루만 일정을 빼면 만날 수 있었는데 뭐에 쫓겼는지 다음에 보자고 했다. 같은 날이 또 오고 또 올 거라 여겼기에 약속을 미루면서도 죄책감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이란, 항상 오는 게 아니었다.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주리올라 다리.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주리올라 다리. ⓒ게티이미지뱅크


요즘에는 영화관 대신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영화를 보다 보니 아무 때나 멈출 수 있고 나중에 봐야지 하고 끄기도 쉽다. 하나 한번 미뤄둔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건 사실 드물었다. 어쩌면 중학교 시절의 우리는 한번 놓치면 되돌리기를 할 수 없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했던 영화관에서의 관람을 그래서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오롯한 현재에 대한 집중의 순간 말이다. 이렇게 또 후회하고서야 배운다. 방금 우리가 둘러보며 바라본 모든 것들은, 지금 내 귀를 스쳐가고 있는 이 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같이 많이 웃을 걸 그랬다. 이제 산 세바스티안의 뒷골목 바에는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시게 될 뒤늦은 한 잔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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