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줄 사람 없어 더 큰 위험 막으려고...혀 절단은 정당방위"

입력
2020.09.11 04:30
남성 생면부지에 주위에 사람 없으면
검찰ㆍ법원서 여성 방어수단으로 인정
차에서 남성 혀 깨문 부산 사건도 유사
"가해자 시각서 행위 정당화 경계해야"


지난 7월 부산에서 만취한 여성에게 키스를 했다가 혀가 잘린 남성은 부산 광남지구대로 직행해 여대생 김수정(가명)씨를 중상해 혐의로 고소했다. 김씨는 남성을 강간상해 혐의로 맞고소했다. 이한호 기자


성폭력 사건에서 추가 피해를 막으려고 여성이 상대의 혀를 절단했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지난여름 부산에서 발생한 혀 절단 사건(본보 9월 10일자 1ㆍ2면 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0916500004251) 보도로 성폭력 사건 발생 시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여대생 김수정(가명)씨는 지난 7월 19일 아침 생면부지의 30대 남성이 만취 상태인 자신을 차량에 태워 산길로 이동한 뒤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자, 그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가 남성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김씨도 남성을 강간상해 혐의로 고소해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김씨는 강간을 시도하는 남성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정신적 고통도 크다고 호소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혀 절단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강조하며, 경찰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정당방위 판단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이고, 어떤 경우에 법적으로 인정이 될까. 한국일보가 법원 판결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분석해봤다.


남성은 만취해 길가에 앉아 쉬고 있던 김씨를 차에 태운 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갔다. 사진은 남성이 차를 세웠던 부산 연제구 황령산 등산길의 모습. 이한호 기자


친밀도, 공개장소, 후속행위 등이 변수

대법원은 1989년 강제추행을 당하던 30대 여성이 가해남성의 혀를 깨문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남성 2명이 경북 영양군의 골목길에서 귀가 중인 여성의 팔을 잡아 넘어뜨리고 강제로 추행하자, 여성은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저지했다. 혀를 잘린 남성이 여성을 고소했지만, 대법원은 하급심 판단과 달리 여성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여성은 정조와 신체의 안전을 지키려는 일념에서 엉겁결에 남성의 혀를 깨물었고, 이런 행위는 자신의 성적 순결 및 신체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로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엔 혀 절단 행위에 대해 재판까지 가지 않고 검찰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된 경우도 있었다. 2012년 의정부지검은 검찰시민위원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성의 혀를 깨문 여성을 기소하지 않았다. 남성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여성은 남성이 입속에 혀를 집어넣자 이를 깨물어 절단했다. 검찰시민위원회는 “성폭행 위험 상황에서 적극적인 자기방어를 허용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봤다.

물론 혀 절단 행위가 모두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정당방위는 사회상규에 비춰 '상당한 정도'를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일보가 최근 10년간의 판례를 분석한 결과, 정당방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로는 두 사람 간의 친밀도, 공개된 장소에서 발생했는지 또는 주위에 도와줄 일행이 있었는지 여부, 혀 절단 후에도 계속해서 방어행위를 했는지 여부 등이 있었다. 즉 두 사람이 평소 친분이 있었거나, 공개된 장소에서 성폭력이 발생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거나, 혀를 절단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가해자를 공격한 경우에는 과잉방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2018년 모텔에서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가 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성에게 유죄(벌금 50만원)를 선고했다. 여러 차례 자신과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간 적이 있던 남성이 갑자기 자신의 입에 혀를 집어 넣자, 여성은 남성의 혀를 깨물고 빈병으로 남성의 이마를 내리쳤다. 여성의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 받지 못한 배경에는 두 사람이 모텔에 같이 갈만큼 친밀한 관계였고, 혀 절단 이후 강제 키스가 중단됐음에도 여성이 계속해서 공격했다는 점이 영향을 줬다. 재판부는 "여성이 거절이나 반대 의사표시를 했다면 남성이 키스를 중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혀를 깨물어 절단하고 병으로 이마까지 때렸다”며 여성의 행위를 과잉방위로 봤다.

혀를 절단하지 않는 대신 성폭력 행위를 막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50대 여성은 2016년 평소 알고 지내던 남성이 라이브카페에서 강제로 키스하자,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자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에 대해 "주점은 공개된 장소로서,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손님이 있었고, 여성이 두 손이 자유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혀를 깨무는 방법 이외에 다른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며 여성의 정당방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성이 여성의 혀를 절단한 사례도 있었다. 2014년 서울고법은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한 여성의 혀를 깨문 남성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개된 장소에서 어깨 등을 밀치거나 일행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으로 당시 상황을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 있었다"며 남성의 혀 절단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의 덩치가 남성보다 컸지만, 여성의 몸을 밀쳐내는 방식으로 충분히 키스를 제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만취 상태였던 김씨가 숙소로 가려다 잠시 앉아 쉬고 있던 부산 서면역 인근의 거리. 이한호 기자


지난여름 부산 사건은 정당방위일까

그렇다면 지난 여름 부산에서 발생한 김수정씨의 혀 절단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학계와 여성계 전문가들은 길거리에서 쉬고 있던 만취 상태인 여성에게 초면의 남성이 다가와 차량에 태운 점,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우고 강제로 키스를 한 점, 김씨가 주위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태였던 점을 종합해 보면 정당방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정당방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김병수 부산대 법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무의식 상태에서 이물질이 들어왔을 때 밀어내는 것은 본능”이라며 “혀를 깨문 행위는 당시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최후의 수단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순생 부산여성의전화 상임대표도 “김씨가 고함을 지르거나 밀쳐 내는 방식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씨를 변호하는 법무법인 법과사람들의 우희창 대표변호사는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허용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했고, 강제 키스가 종료하자 김씨가 방어행위를 중단한 점을 고려하면 정당방위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 혀 절단 사건 현장 위치.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진=이한호 기자


피해자다움 요구 말고 가해자 행위에 초점을

여성의 혀 절단 행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보다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지난 5월 성폭행에 항하다 가해자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최말자씨가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자, 여성의 방어권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부산지법은 1965년 중상해 혐의로 기소된 최씨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남성은 당시 최씨를 세 번이나 넘어뜨려 강제 키스를 하면서 강간을 시도했는데도,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 8월 21일 오후 2시 재심청구 1차 공판에 모습을 드러낸 최씨의 목소리에는 떨림과 한숨이 뒤섞여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 버린 과거의 법적 판단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검찰이 재심 개시에 반대하고 있어 억울함이 풀릴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최씨의 법률지원단은 이날 법정에서 혀가 잘린 남성이 봉합 수술 뒤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했고, 위법한 검찰 수사에 기초한 판결이기 때문에 재심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사건에서의 혀 절단 행위와 관련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여성은 가해자에게 강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남성의 성폭행을 피하려다가 자칫 흉기 등 위험한 물건을 사용하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간죄에 있어서의 정당방위’ 논문을 쓴 이무선 한세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강간을 당하는 상황은 매우 위험하고 특수하다”며 “방위수단이 적정했는지 판단할 때는 특별히 상당성을 초과하지 않는 한 폭넓게 인정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병수 부산대 법학연구소 연구교수도 "‘여자가 남자 인생을 망쳤다’는 식으로 가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면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계속 나온다. '여성이 치마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범죄를 안 저질렀을 것'라는 식의 변명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가해자 대신 피해자를 비난해 가해자 책임을 줄이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며 “모든 범죄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여름 부산에서 발생한 혀 절단 사건에 대해서도 "여성이 만취했고 남성 차량에 탑승했다고 해서,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허용한 것이냐”라고 반문하며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서 범죄 성립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밝혔다.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도 "피해자의 방어행위를 문제 삼기보다는, 가해자가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채지선 기자
이인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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